잿빛 이미지와 類比와 감촉



장석원 (미술평론가)

金裕俊은 이미지의 초월적 개념들을 좋아한다. 脫時間帶의 이미지들이 事物을 대신하여 소리지르기 시작할 때, 기분 좋은 넙죽한 웃음을 흘린다. 그의 그림은 결코 사물에의 꿈도 소유를 위한 집념도 아니다.

언제 지워버려도 좋을 사물의 標識들을 등장시킬 때, 새가 하늘을 날을 때의 기분으로 超時代性의 자유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일의 의미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무런 제약 없이 여행한다는 자유를 뜻한다. 둥실 뜬구름으로부터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날, 술 마시러 화실 문을 나서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사로잡는 각종의 이미지들이 시야에 들어와 박히는 것이다. 나무, 꽃, 돌, 열매, 구름 그리고 별 의미 없이 떠오르는 숫자…,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몸을 적시듯 캔버스 위에 또렷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정적을 맛본다.

왜 예술은 어렵게 설명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예술은 너무도 선명하게 일상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예술은 죽은 관념의 허물을 벗고 새롭게 우리들 눈앞으로 다가서게 된 것이다.

그가 교원대학에 강의 나가는 중 기차 안에서 읽는 옥타비오빠스의 詩集「태양의 돌」에서 이런 대목이 쓰여 있었다.

'나는 사실 시간이나 죽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려고 쓰는 것도 아니다.
나는 시간이나를 통해 살도록, 되살아나도록 하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 오후는 다리 위에서 강물 속으로 태양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옥타비오빠스가 그에게 보내는 강렬한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마치 그가 그 자신에게 보내는 수많은 메시지로서 그림을 그리듯, 소나기 같은 메시지로서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뿌리듯이, 그러한 강렬한 충동을 받는 것임이 틀림없다.

金裕俊은 홍대 앞 작업실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오리진 會員으로서 몸담아 온 과정이나 홍대를 졸업한 동료 화가들과 마주보며 작업실에 머무는 이유는 그곳에 그를 자극하는 미술의 현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서 떠오르는 각종의 이미지들은 浮標처럼 그들 사이에 끼어 든다. 때로는 분노의 표시로서 때로는 낙담과 슬픔의 흔적으로 그것들은 사람들 사이를 맴돈다. 그는 어릴 적 고향의 기억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기억의 편린들이 화려하고 강렬한 형태로 잠입해 들어온다. 우울하고 두툼한 화면 위로 조그맣게 일어서면서 그의 삶은 비로소 활기를 띠는 것이다.

회색 빛 공간 너머로 사람들이 눈이 그렇게 마주치듯이 그가 포착한 기호들은 그렇게 잠재적 역량을 키워 나간다.
그 위에 눈동자가 응시하며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