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된 원초적 침묵

- 본인의 작품 (내재된 기호) 연작을 중심으로 -



1. 원초적 언어, 기호
어린 시절을 강원도에서 보낸 나는 산과 들에서 만난 동식물들과 말하며 교감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들은 나에게 다가와 날마다 다른 햇볕의 따스함에 대하여 말하고, 세찬 비의 두드림과 바람의 살랑한 수런거림을 전해주며 그들이 가진 비밀스런 색깔들도 보여주었다. 먼 길을 달려가는 물소리와 키를 재며 자라는 나무들이 계절마다 꽃을 피우는 모습에 환호하던 아름다운 시절은 아버지와 함께 잦은 이사를 다니면서 점점 잊혀져갔다. 신비한 자연 속에서 때로는 소란하게 또한 은밀하게 늘어가던 나의 말과 언어도 새로운 환경으로의 전학,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거듭 될 때마다 조금씩 사라졌다. 들판에서 샘솟던 말을 잃게 되고 소극적이며 내향적인 성격으로 자라면서 나는 내 안의 나로부터 들리는 또 다른 소리에 점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에게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해되는 언어들은 성년이 되어서도 계속 생소하고 어려운 삶의 숙제로 쌓였고, 이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나는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유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자연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하고 싶은 마음을 부여잡고,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불가피한 시간들을 겪으며 마침내 2000년 5월 처음 개인전을 할 수 있었다. 홀로 준비하고 겪어낸 첫 전시의 모든 과정은 그림과 관련된 지인들이 아무도 없었을 만큼 매우 외로운 시작이었다.








Inherent Signs 18-5, 130 x 162cm, Acrylic on Canvas, 2018







Inherent Signs 18-4, 130.3 x 162cm, Acrylic on Canvas, 2018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유일한 안도와 휴식의 대상인 그림에 더욱 몰입하도록 해주었고, 처음 본 악기를 연주하듯 삶이라는 음악과 그것의 연주 과정이라는 주제인 (연주하다)로 표현되었다. 화면 속의 연주자와 하나 된 악기는 욕구의 표상으로서 삶에 대한 애착과 카타르시스를 내포한 것이며, 나 자신인 동시에 살아오면서 함께하고 끌어안으려 노력했던 타자들이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거울에 비친 나르시시즘적인 나의 이미지를 악기와 동일시하며 타자와의 관계 속 주체로서의 자아를 확인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본능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색채와 움직이는 선을 강조한 작업들로서 마치 상처받은 나의 무의식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내면의 욕구를 악기로 형상화시켰던 도상이 오히려 구차한 에로스的 변명으로 전락하는 듯 한 자기불안과 그로인한 좌절의 시간을 견디면서 점차 요약하는 선, 정리하는 선으로의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선을 찾아 방황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1910~1962), 크리스토퍼 울(Christopher Wool, 1955~), 멜 보흐너(Mel Bochner, 1940~)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작업은 나의 무의식에서 지각과 관념의 현상적 근원을 찾는 열쇠로 작동하였다. 단단하고 힘찬 구조적 선을 가진 프란츠 클라인은 선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주었으며, 크리스토퍼 울과 멜 보흐너의 자유로운 드로잉과 레터링(lettering) 작업들은 내안에 깊게 억압되어왔던 말하는 욕구를 자극했다.






그것은 무의식의 바다에 침잠해있던 원초적 본능으로서 내가 ‘드러내어 하고 싶은 말’, 내 안의 나로부터 2차원 평면의 공간으로 ‘발현되어 나오는 말’, 즉 기호(記號, Signs)를 쓰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기호란 어떤 내용을 상징하고 전달하는 표현형식으로 생각이나 의지, 감정 등이 문자를 비롯해 몸짓, 말과 같은 신체적 과정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는 사물의 표상화인 동시에 인간 내적 과정의 산물로서 인간 정신의 내부와 외적인 요소들을 연결하고 매개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조명식, 「현대회화에 있어서 선의 기호화」, 성신여자 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0, p. 2.) 그러므로 나와 우리는 이미, 표현되고 매개된 기호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기호는 무의식에 잠재된 본능과 욕구, 즉 원초적 언어-프로이트에 의하면 관념적 표상체(Vorstellungsrepräsentanz) (박찬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 무의식:프로이트의 라캉 읽기」『우리시대의 욕망 읽기-정신분석과 문화』, 라캉과 현대정신분석학회, 1999, p. 13.) -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된 본능과 욕구는 예술작품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출된다. 본인의 작품에서는 드로잉 및 쓰기라는 행위의 신체성을 통해서 무의식이 발현된다. 억제되어 밑바닥에 쌓이고 가라앉았던 감정들이 올라 올 때까지, 그리고 그것이 보일 때까지 수없이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는 발현의 원시 공간, 즉 바탕은 회화적 정서를 내포한다. 파랑, 노랑 등의 원색에 가까운 색채는 무의식의 원초인 감정의 종류와 깊이를 환유하며,




Inherent Signs 18-3, 130 x 162cm, Acrylic on Canvas, 2018







Inherent Signs 18-2, 130 x 162.5cm, Acrylic on Canvas, 2018



본인의 작업에서 기호는 회화적 이미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관념의 표상체, 즉 원초적 언어로서의 ‘되어지는 말’이라는 원본적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깊은 무의식으로부터 선택되어 주문이나 후렴과 같은 일종의 주술(呪術)적이고 경구(aphorism)적인 상태로 변환된다. 본인작품 속에 존재하는 기호는 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원본(원의)으로서의 의미변화를 통해 새로운 메타포(은유, metaphor)를 획득하여 ‘되어진 말’이 되는 것이다. 회화는 색채와 형태라는 보이는 구조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진정으로 표현적인 회화는 하나의 의미를 위해 하나의 기호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그 의미는 늘 발생(현상) 중에 있다. 결국 화가는 즉각적, 정신적 자아가 아닌 삶에서 체득한 스타일을 표현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김화자 역, 2005, pp. 128~129.)하는 것이다.

본인의 작품 (내재된 기호) 연작의 전반에 걸쳐서 색채는 현실세계의 재현 수단이 아니라 체험된 원초적 세계로서의 침묵의 언어이며 심리적 기호이다. 색은 본인의 유년시절 자연으로부터 기억된 경험이며 생의 전 과정을 통해서 기록된 무의식의 흔적이다. 또한 일상의 모든 관계에서 존재감이 드러나고 역할에서 선명하기를 원하는 본인의 성향과 유년의 아름다운 기억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나르시시즘적인 욕구를 동시에 반영한다.






2. 예술, 非가시적 존재를 가시화 하는 제스처(gesture)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는 그의 저서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에서 ‘회화란 비가시적인 존재를 가시화 하는 것이므로 예술작품은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존재를 가시화 하는 방식, 즉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위의 책, p. 122. 그는 ‘예술 작품의 본질을 제스처(geature)에 의한 원초적 존재의 표현’ 위와 같음.)으로 규정하고, 그 제스처로 간주된 언어의 표현 현상인 회화에 있어서 언어는 의미적인 동시에 표현적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제스처는 주체로서의 실존적 태도를 암시하는 자발적 언어행위, 즉 기호라는 몸의 표현 현상이다. 우리의 언어와 표현들은 순수한 의미작용 만으로서가 아닌 우리의 모든 인식과 체험이, 그 가치와 동시에 만나는 지각들의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본인이 (내재된 기호)를 발견하여 쓰는 행위의 신체성은 재료가 주는 물성을 통해 기호 자체의 자의적인 의미연상을 넘어서게 된다. 아울러 선(또는 획)으로 펼쳐지는 욕구, 기억과 감성의 색채는 기호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되거나 받아들여지는, 의도와 의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쾌의 도구로서 작용한다. 연작하고 있는 본인의 작품 <내재된 기호>는 구체화된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를 탈피한, 무의식에 내재되어 개념화 될 수 없었던 경험과 기억이 ‘그리기’라는 행위를 통해 표출되는 작업이다.

3. 선(line) - 이미지의 축약, 그리고 기호
선은 점의 궤적이다. 점이 가지는 완전한 정지를 파괴함으로서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의 비약 (W. Kandinsky,『점ㆍ선ㆍ면』, 차봉희 역, 2004, 열화당, p. 47.)을 가진다. 점의 움직임으로 생기는 선은 따라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색과 더불어 매우 적합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선적인 요소로 기호화하는 것은 기억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마음속에 일어난 본능적 추상작용이며 이 추상작용은 대상의 궁극적인 본질을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조명식, 「현대회화에 있어서 선의 기호화」, p. 10) 선은 제스처이다. 또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도구, 내면의 자유로움과 유희성을 추구하는 방법이자 감성을 내포한 언어적인 기호이다. 본인의 작업에서는 서예의 필묵(筆墨)과도 같은 느낌으로 일획(一劃)의 드로잉을 사용하였다.




Inherent Signs 18-1, 162 x 130m, Acrylic on Canvas, 2018







Inherent Signs 17-3, 97 x 130cm, Acrylic on canvas, 2018



점으로부터 호흡을 따라 가는 선은 본인의 무의식에 내재된 기호를 드러냄에 있어서 몸 ‘나’가 아닌 참 ‘나’로서의 동선(動線)을 가진다. 선의 운용은 상.하, 좌.우를 나누지 않으면서도 비움과 채움의 여백(대표작품, 도판1), 소(消)와 밀(密), 리듬과 강약의 배분을 하게 된다. 움직이는 선은 화면에서 입체감과 생명력을 지니며 조형언어를 만들어 간다. 이는 동양화에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적 의미인 상(象)을 추구하여 형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재된 하고 싶은 말’이 상형문자의 형상이나 고대한자(漢字)의 心, 女, 혹은 동물의 얼굴과 같은 이미지로 도출된다. 이것은 우연하고 예기치 않은 발견으로서 잠재되어있던 무의식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도가미학(道家美學)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마음 심(心)은 무(無)의 상태, 즉 도(道)인 자연의 상태를 지향하는 주체로서 매우 자연스런 표현이기도하다. 장자(莊子)가 말한 것처럼 개념(槪念)은 의도한 생각을 충분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형상(刑象)은 이를 충분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 협랑(叶朗), (『中國美學史大綱』, 이건환 역, 백선 문화사, 2000, 제1편, p. 140.)

본인의 작업은 대부분 검은 색을 밑바탕으로 시작한다. 검은 색은 일차적으로 본인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자(老子)는 검은 색, 즉 먹색을 현(玄)이라 하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道를 상징 한다 (이상효,『여백, 그 순백한 기다림』, (서울:아트나우), 2006, p. 58.) 고 했다. 현은 색이 없는 색, 스스로를 소멸시켜 가는 색이고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깊이를 가진 색 위의 책, p. 59 이다. 검은 색은 無(우주, 무의식, 공간)에서 有(생명, 형상, 언어, 욕구)가 탄생하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도가적 사상을 내포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무(無)화 시킨 캔버스를 바라보는 동안 떠오르는 감정색들은 본인의 동양사상에 기반한 것으로서 상생의 이타심이 사랑(赤, 심장)과 포용(黃, 땅, 중앙)의 지향으로 담겨져 있다. 또한 삶을 운용함에 있어서 차가운 이성으로 자신을 바라보고자 하는 희망(靑, 생명)과 비움에의 의지를 흰색(白)으로 표출하였다. 화면의 조형성을 돕기 위해 함께 사용된 텍스트(text)는 신문을 비롯해 미술관의 인쇄물, 후원하는 단체에서 온 편지글, 선호하는 시의 내용 등이다. 붙이거나 옮겨 쓴 문자로서의 텍스트는 본인의 일상과 관심사들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무의식의 관념적 표상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상형 문자적 이미지, 무의식적 웅얼거림, 대리 발언, 흐린 기억의 단편, 또는 의미 없는 흔적선, 낙서와 같은 회화적 매스(mass)로서의 기호를 함의한다. 연작 (내재된 기호)의 시작은 매우 많은 언어적 기호였으나 지속적인 작업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와 같이 이미지를 함유한 기호(또는 관념적 표상체)로 정리되고 압축이 되었다. 본인의 작품은 무의식에 담긴 비가시적이고 정의될 수 없었던 관념적 표상체인 상형 문자(기호)의 해독의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모리스 메를로 퐁티가 말한 ‘제스처(gesture)에 의한 원초적 존재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울러 동양적 사상의 근거를 가지고 현대를 사는 한사람으로서 현대회화의 표현 기법을 사용하는 본인의 작품은 서양 철학의 관점과 동양 철학의 관점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예술은 우주 삼라만상이 운행하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길인 도(道)를 실현하는 것처럼 내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기쁨이며 그 행위의 순간은 해탈에 가까운 경지의 체험이기도 하다.

삶의 긴 여정을 지나오면서 나와 함께 한 그림들은 많은 위로를 비롯하여 본인의 내면에 쌓인 상처와의 화해를 도모했다. 건강한 자아를 가질 수 있는 데에 필요한 자존감도 얻게 되었다. 호수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있는 것 같았던 시간, 그 존재의 중심 가장 아래에서부터 솟아나오는 표현에의 욕구들은 매일 작업실을 향하게 만들었다. 많은 여행 중에서 숨 쉬듯 쌓이는 새로움의 잔상들 또한 가슴 속의 뜨거운 열정과 합쳐졌었다. 그렇게 살아 이어온 그림의 기록들은 한편으로, 매번 전시가 끝날 때마다 남모르게 감내해야 했던 회화적 표현의 부족에 대한 좌절의 극복 과정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엄격하게 돌아보면서 성장하고 발전하려는 노력은 예술에 관한 철학적 탐구와 더불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본인은 앞으로도 계속 (내재된 기호) 연작을 통하여 무의식에 내재된 상징계의 자아를 만나고 본능의 언어를 발굴, 획득하여 참 나의 모습을 찾으려한다. 그 나아감에 있어서 물성을 비롯한 표현의 다양성과 함께 기호라는 광의에서 좀 더 세분화 되고 동양적 사유의 깊이를 더한 회화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고자 한다.

- 김영수 (artist & VergilAmerica repoter) -




Inherent Signs 18-6, 163 x 130cm, Acrylic on canvas,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