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충만

송수련



자연과 인공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은 온통 인공 구조물로 가득찬 도시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유년과 청춘기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모여 들며 나날이 첨단 대도시로 변해간 서울의 에너지를 맘껏 얻었으면서도, 아직까지 자연과의 교감에 그다지 서투르지 않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 서울의 저 멋진 건물에 감탄사를 지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자라던 나무와 풀과 꽃의 풍경을 기억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잘 정돈된 한강변 대로를 자동차로 가고 오면서도 역시 나는 내 유년의 무성한 갈대밭에 지던 석양의 노을빛과 한겨울 꽝, 꽝 소리를 내지르며 파랗게 얼음이 얼던 강의 모습을 떠올린다. 서울은 그제나 이제나 모두 아름답다, 그 자연과 인공의 거리 사이에 내 삶에 이끌린 것은 그것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연만으로도, 그렇다고 인공만으로도 나의 삶은 그려지지 않는다. 자연과 인공이 겹쳐지는 어느 자리엔가 내가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이치
물론 우리 삶의 자리가 거대한 인공의 공간으로 바뀌어 갈수록 내가 더욱 자연에 빠져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취향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내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 자신이 자연의 한 요소로서 나고 자라 늙고 죽는 길 위에 있다. 자연은 지금의 내가 정지된 확고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또렷하게 말해준다. 나는 과거로부터 와서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한 생명이다. 한 포기의 풀이, 한 그루의 나무가, 깊은 산의 샘으로부터 솟아나와 저기 거대한 한강에까지 도달한 물이 그러하듯 나도 나날이 변하여 간다.생명은 그래서 움직임인데, 나는 내 존재에 스며들어 있는 그 시간의 깊이를, 거기에 새겨진 삶의 의미와 표정을 그리려고 해왔다. 그 동안 내 그림을 수놓은 테마들이 성취 여부와는 별도로 모두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다.

나와 우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저 장구한 역사 속의 아주 사소한 한 개인이지만, 동시에 내 안에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다. 내 육신에 새겨져 있는 가까운 조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부족과 종족의 역사가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유도 알 수 없이 어떤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무언가 아직 표현되지 않은 어떤 세계를 한사코 붙잡으려 애쓰는 것을 보면, 내 안에는 나 말고도 분명히 다른 누군가가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 그들의 삶이, 내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태어날 생명들까지도. 그러니 나는 그냥 내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통해 여럿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그것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어쨌든 내 느낌과 내 표현 안에는 쉽게 테두리를 그을 수 없는 ‘우리’가 함께 숨쉬고 있다. 저 자연의 한 가운데를 거쳐 왔고, 앞으로도 거쳐 갈 우리들이.

아름다운 늙음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생각은 내 안의 그 모호한 감수성과 의식을 조금은 명료하게 매듭지어 보아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갈수록 철 지난 들판의 자연에 시선을 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물론 내 나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봄의 푸릇한 기운과 여름의 무서운 분출과 성숙을 경험과 자연, 나도 그런 자연의 한 귀퉁이가 아닐까, 그렇지만 그 자연이 꼭 쇠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나간 시간의 궤적을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으로 내 눈에는 보인다. 아니, 내가 나고 자란 시간만이 아니라, 저 우주가 지나온 시간의 자취가 지울 수 없게 남아 있다. 그러니 그 늙음이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까. 나는 신생(新生)의 녹색과 여름의 순결하면서도 화려한 꽃을 다 지워낸 연잎에서 그런 자연을 만난다. 가을 물가에 고개를 꺾고 있는 연잎은 그래서 내게 소멸과 쇠락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나타내는 뜨거운 상징이다. 본질만 남은 자연의 구상성을 통해 무한한 추상을 표현해보고자 하는 것이 요즘의 내 작업이다.

관조와 내적 시선
나는 그 작업에 오래도록 ‘관조(觀照)’라는 이름을 붙여왔다. 그 것의 본질을 응시하려는 영혼의 시선이다. 사물의 유한한 세계를 넘어 추상적 본질에 가 닿으려는 내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관조는 사물에게 가 닿는 내 몸의 물리적 시선이 아니라, 내 안의 내면적 시선을 의미한다. 그 내적 시선이 가지 않는 곳에서 대상은 사물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와 비로소 살아 있는 그 무엇이 된다. 준재의 내면의 체를 통해서 걸러진 시간과 정서가 버무려져 생명력 가득한 조형 의식으로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때의 내적 시선은 나의 것이다. 내가 다 알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난 대상이 나를 넘어 다른 우리에게 공통적인 그 무엇을 환기시키는 촉발점이 되기를 바라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텅 빈 충만
그래서일까. 요즘 그리는 것 못지않게 덜어내는 데 열중하는 내 모습을 확인하곤 한다.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 그린 뒤의 지움 혹은 그림을 통해서 맨 마지막의 본질만 남기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본질을 만들지 않는다. 그 본질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다만 본질을 찾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최대한 비워낸 그곳에서 내 작업을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유와 감성을 자유롭게 투사하여 가득 채워가기를 나는 바란다. 나는 내가 생각한 본질을 그려서 제시하지 않는다. 부차적인 것을 하나씩 덜어낸 자리에서 어떤 텅 빈 충만의 본질이 먹의 은은한 향기처럼, 종이 위에 잔잔하게 번지는 색조처럼, 물감에 은근하게 녹아 있는 어떤 정서처럼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