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샘물에 고이는 기도의 노래



김옥조 (광남일보 문화팀장, 호남대 겸임교수)



아직 새벽 공기는 차갑다 어둑어둑 사립문 밖으로 달빛이 지나간 다음, 세상을 깨우는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온다. 어머니다. 어머니는 고단한 가족들의 숨소리를 다독이며 기도하셨다. 언제나처럼 여명이 움트기 전 부뚜막에 앉아 두 손을 모으시는 것이다. 하얀 사기 그릇에 새벽 샘물을 길어 떠놓으시고 모두의 복을 빌었다. 정안수 였다. 그 맑은 정안수 그릇에 평생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 어머니의 새벽 비손소리가 담기는 것이다. 소리 없는 어머니의 기도는 아무도 모르게 우리들을 키웠고, 세상은 그 힘으로 어려운 시절을 이겼다. 다시 부뚜막에 다가 앉아 변함없이 가족과 자식, 조상의 발복을 빌었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정안수 떠놓고 새벽을 여시던 우리의 신, 어머니여.

서양화가 신호재씨는 유년시절 보고 들었던 ‘정안수의 추억’을 줄곧 작업으로 풀어온 작가다. 대학시절을 포함, 본격적인 그림을 그 린지 20여년 가까운 화필의 이력을 보거나, 그가 아직 40대 초반의 작가라는 점을 보더라도 한 가지 주제에 너무 깊이 발을 집어 넣은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 분명하다. 어떻게 그리느냐,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는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다. 늘 그의 가슴을 짓누른 숙제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쏠려있다. 물론 작가에게 있어서 표현의 방식과 가시적인 형태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는 한시대를 살아가며 그 시대의 정신을 해석하고 표현하고 기록하는 예술가로서의 과연 무슨 메아리를 세상에 울릴 것인가에 사고의 중심을 둔 듯하다. 그것이 그의 회화관의 단면으로 느껴진다.

그는 말한다. “제가 정안수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 것은 어렸을 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새벽에 부엌에서 정안수에 무엇인가를 비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겁니다. 그 그릇은 곧 고향이고 숙연한 마음이지요. 나와 가족,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던 토속적 향수를 불러 더욱 흥미가 있습니다.” 그가 다루는 주제 ‘정안수’는 바로 이런 그의 회화적 시각과 취향을 들여다 보는 바로미터가 된다. 작가 스스로도 말하듯 정안수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에 대한 애젖한 그리움이고 나아가 비손과 기도, 믿음의 신앙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그가 그림으로 담으려는 ‘정안수’ 역시 어린시적 부뚜막에 웅크리고 앉아 아무도 모르게 새벽기도를 올리던 어머니의 그 심정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바로 염원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가 지성스럽게 화면 속에 모시는 ‘정안수’ 그릇은 다른 측면으로 보면 인류문명의 시작을 상징한다. 실용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릇은 인류문명 최고의 기술력과 표현의지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정안수’는 깨끗한 물이다.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그 무엇도 섞이지 않는 순수한 생명수인 것. 게다가 모두가 잠들었다 서서히 깨어나는, 동이 움트기 직전의 정갈한 시간에 존재한다. 가장 숭고하고 간절한 열망을 모으는 행위의 공간도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은 이런 의미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이중적 매력을 가졌다. 화면 속의 정안수는 오히려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조형기법이나 화면 구성방식이 매우 서구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구상, 즉 추상화를 보는 듯 한 강렬한 색감의 대비나 공간의 분할은 극히 위압적인 상황을 자아내기도 하지 않나 싶다. 그 사이 사이에 정안수의 염원이 자리하는 까닭에 스치듯 봐서는 새벽기도의 그 맑은 염원을 끄집어 내는 일이 쉬울리 없어 보인다.

“원래 사실적인 작업을 10년 이상 했습니다. 사실적인 표현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추상은 나만의 대화입니다. 화면 상에서 추상과 구상이 엮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현대 회화는 작가의 감성분출의 자율성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주제와 소재에 대한 고민을 작가 중심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기성의 회화관이나 표현방식의 거부하면서 ‘자기것’ ‘개성’ ‘독창성’ ‘차별성’에 의존하는 경향이나 재료의 다양성이 곧 이 같은 평민회화의 자유로움을 뒷받침해 왔다. 그는 이런 시대의 조류도 소홀히 하지 않는 까닭에 얼핏 보면 추상회화의 감각을 더욱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

인생과 인간의 근본 문제를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 이런 그의 회화적 단상을 때로 주제와 표현의 상층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주제와 현대적 표현력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긍정적 인상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솟대를 비롯 암각화의 이미지나, 명태를 그리고, 최근에는 별자리에도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민간신앙의 흐름을 좇으며 이 시대인의 감성을 건드리는 미학적 소질을 보여준다. 구상과 비구상의 공존은 말할 것도 없고 색감에 있어서도 블랙과 화이트가 부딪치는 느낌, 안개 낀 밤의 정취처럼 블루톤의 이미지가 피어 오르는 공간은 시각적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유하 물감에서 잉크,페인트,크레용,아크릴 등 다양한 재료로 캔버스와 나무판까지 그의 표현 대상이나 재료가 된다. 최근 작품에서 흑백의 색감은 청색조로 흐르고 있다. 또 형태의 과감한 생략과 단순화도 특징적 변화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