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ttling sound of the window, the wind being slashed by electric cables, configuration of shaking of the
tree branches, the commotion created by the fluttering of flags, tranquil ringing of wind chimes underneath the eaves and the sound made as it
passes through the earlobes are the fragments of wind we experience in our daily lives. Moreover, the emotional cognitions such as refreshing,
splendor, wriggling, pleasant, sung, comfortable, lonely, melancholy, mournful, fearful and sad are the memories of wind that we have. In
addition, the existence of wind is being recognized and described through quite natural and generalized perceptions.
Such configurations of the fragments and the emotionally perceived significances draws out extensive cognition and rumination by acting as
gloomy, ruthful and, at times, joyous and exhilarating configurations in my life.
Several thousands of traditional Korean papers attach onto the screen were used to express the configurations of wind because its material
properties including flexibility, softness and lightness are appropriate to emulate the characteristics of wind. Furthermore, distorting and
modifying the original physical properties of the paper by manually manipulating each sheet of paper is another way that the artist seeks to
express of the grain of wind.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 전선을 가르는 소리, 나뭇가지를 흔드는 형상들, 깃발이 펄럭이는 요란함, 처마 밑
풍경의 딸랑
소리, 귀밑을 스치며 내는 소리들 등등 이것은 일상적인 삶에서 체험하는 바람의 편린들이다. 그리고
청량하다, 웅장하다, 꿈틀거린다, 상쾌하다, 포근하다, 편안하다, 외롭다, 쓸쓸하다, 서글프다, 두렵다, 서럽다 등등의 감정적 인식들도 바람의
기억들이다. 또한 바람은 그 존재가 지극히 일반적인 인식들을 통해서 의식되어지고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편린의 형상들과 감정적으로 인식되는 의미들은, 내 삶속에서 암울하고 서글프게, 때로는 즐겁고 상쾌한 형상으로 작용해서 사유와 반추를
이끌어 낸다.
화면위에 부착된 수천 장의 한지들은 바람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용된 것이며, 종이의 물성인 유연성과 부드러움 그리고 가벼움의 특징들은
바람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이 한 장 한 장의 손놀림으로 원래의 물성을 왜곡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바람의 결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Upon viewing Pyo’s landscapes the viewer can’t help but associate them with Chinese late Sung and Yuan Period wen-ren
scholar-recluse paintings. Pyo’s landscapes and motifs are both simplified to their most essential characteristics appearing almost totally
abstract, and appear sparse yet rarefied in their starkness. Because Pyo uses white paint on paper that’s been fixed on canvas scratching in
his motifs, we can link his methods to Eastern and Western techniques and materials and to both ancient and modern periods. In crossing these
boundaries Pyo demonstrates that he can be avant-garde yet still respect the past and history.
Starting with the most scratching on to the surface of the works is related to the East. This sort of combining old and new, is analogous to
the renewal of time-honored art methodologies. It can also be said that Pyo is using ancient Eastern art as a spring board to an origin aryl
and scape. This was the way by which Chinese art is sin ancient times learned from the historic art of their own masters to proceed creating
their own artistic vocabulary.
Pyo’s legit motifs can be discussed in terms of the Buddhist animism of Tsung Ping who believed in the sympathetic relationship between the
lei and kan-lei. Whereas lei simply put, would mean verisimilitude, the kan-lei refer stoa type, another words to the essence. Pyo renders the
kan-lei as essential zed landscape motifs that he expresses in the most economic scratched line, while the background is signified by the vast
white expanse. By juxtaposing the scratched line upon the sparing expansive background he expresses both cold detachment and the emotion of
gesture.
Pyo studied the masters as a springing board off to his own style, a notion analogous to Ni Yu’s i-p’in or uniqueness/ spontaneity which none
the less is associated with the Yuan master Ni Zan and with the Sung painter MiFu also known for sparse landscapes. Pyo’s style uses
abbreviated, gestural and sweeping strokes with the palette knife much likes word play resulting in uninhibited and powerful work.
The suggested pine and softly rendered pavilion in Pyo’s work Lone some Pine, 2011 hearkens back to Yuan paintings of scholar officials who
withdrew from the public are not maintain purity of mind and spirit. His “one corner” as symmetrical composition is also reminiscent of the
southern Sung tradition of Ma Yuan and Xia Gui. But, in Pyo’s work the forms are created out of first adding paint and then scratching it out
rather than in the traditional means fink on paper. Furthermore, Pyo’s forms are not descriptively rendered but are suggested or all used to
as are his mountains and valleys. Line was always important to the Chinese beginning with the Xia dynasty’s use of scratching on bones as
auguries of things to come. Later used as calligraphic line in pictographs, it was used for communicating. The idea of a pictograph is in
itself an abstraction, the preferred style of Pyo.
And, just as the Southern Sung masters retreated from public life as a way of demonstrating resistance to the government, Pyo in his stark and
lonely works exhibits a sweet longing for a past that can only exist in dreams.
표인부의 풍경화를 보는 이는 중국의 후기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 은둔학자들의 웬렌(wen-ren) 회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표 작가의 풍경과 모티브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만 드러나도록 거의 추상화 되다시피 간략화 되어있다. 작가는 캔버스에 고정된
종이 위에 흰색 물감을 칠하고 이를 다시 긁어낸다. 여기에서 포착되는 것은 그의 기법은 과거에도 현대에도 사용되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테크닉과 재료라는 것이다. 표 작가는 이렇듯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으로 전위적이면서도 과거와 역사를 존중하는 작가의 면모를 드러낸다. 먼저
가장 최근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것은 서양의 유화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종이를 사용하는 것과 이를 긁어내는 행위는
동양의 회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과거와 현대의 조합은 시간을 존중하는 예술 방법론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표 작가는 전통적인
동양미술을 자신의 독창적인 풍경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발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자신만의 필체를 터득하기 위해 스승의 작품을 모사했던
고대 중국화가들의 학습 방법과 유사하다 할 것이다.
표 작가의 라이트모티브는 레이(lei)와 칸레이 (kan-lei) 사이의 공감적 관계를 믿었던 청핑(Tsung Ping)의 불교적 애니미즘의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레이는 간단히 말해 신빙성을 뜻하는 반면 칸-레이는 본질의 또 다른 말인 형(type)을 뜻한다. 표 작가는 본질화 된 풍경화의 모티브로서
칸-레이를 묘사한다. 형태는 매우 간략하게 긁어낸 선들로 표현된 반면 배경은 넓게 펼쳐진 흰색 공간으로 나타나 있다. 작가는 긁어낸 선과
공허한 배경을 대비함으로써 무심함과 감정적인 행위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니유 (Ni Yu)의 핑(p’in) 사상, 즉 독창성/자발성의 개념과 같이 표 작가는 그 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했다. 니유의
핑 사상은 쓸쓸한 풍경으로 유명한 원시대의 니잔(Ni Zan)과 송나라의 미불(Mi Fu)의 작품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표 작가는 팔렛트 나이프를
이용해 생략되고, 움직임이 넘치면서도 쓸어 내리는 듯한 필채를 구사해 마치 펜싱하듯 꺼리낌 없고 파워풀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소나무와 집을 표현한 듯한 외로운 소나무 (2011)는 속세를 떠나 정신과 영혼의 순수함을 추구했던 원시대의 은둔학자를 떠올리게 한다. 한쪽
모퉁이의 비대칭적 구조 또한 남송풍의 마원(Ma Yuan)과 하규(Xia Gui)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표 작가의 작품은 먹을 종이에 올리는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에서 벗어나 물감을 먼저 칠하고 이를 긁어내는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표 작가의 작품은 묘사적이지 않고
산이나 골짜기가 넌지시 암시되어 있기만 하다. 진시대에 뼈를 긁는 역술행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에서는 선이 항상 중요한 요소로 여겨져
왔다. 이후에는 서체의 선이 표의문자로 사용되었고 이는 의사소통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사실 표의문자는 그 개념 자체가 추상이고, 바로 표
작가가 하는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부패한 정치에 저항하기 위해 속세를 떠나 은둔했던 남송의 대가 들처럼 황량하고 외로운 표 작가의 작품은 꿈에서나 존재할 법한 옛날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선(드로잉)의 그 어떤 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사실적 혹은 구체적 형상을 버리고, 처음 사물에서 느낀 이미지들을 내 자신의
순수한 감성으로 접근해서 표현하고자 했다. 사물들을 내가 인식한 내 의식들 속의 순수한 감각들을 동원해서, 그 사물이나 대상에 접근하여
마침내 그 정점에 도달하며, 비로소 맞이하게 되는 그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에 접근해 보고자 함이었다... 표피적인 인식들에서 보여 지는 사물의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해체해 들어가면, 그 사물의 본질에 근접할 것이며, 작가 본인의 진실성이 증명되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믿기로 했다...” (작가노트)
작가 표인부(表仁夫)의 작업에 있어서 서양화와 한국화의 이분법적 경계설정은 무의미하다. 이는 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수인(水印)판화를 학습한 그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인물이나 풍경을 소재로 하여 부단한 기법적 실험의식으로 점철된 모색의
시간을 거친 후, 근자에 보여 지는 작품들은 아크릴 물감과 장지, 먹의 물성을 활용한 동양적 사유의 궤적을 현대적 어법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는 산수 혹은 풍경을 그린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풍경은 단순히 가시적으로 설명 되어 지는 실경(實景)으로서의 자연이 아닌 그 근저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자연 그 자체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자연의 외피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식과는 거리를 둔 심상(心象)으로서의
자연풍경을 그리는 것이다. 그로인해 그의 화면 속 풍경은 감춘 듯 드러나는 미완의 형상들이 어우러지고 마치 심리적 거리를 두고 소요하는 듯한
묘경(妙境)으로서의 자연의 자태가 시선을 끈다.
그가 자연의 본질을 추출하기 위해 선택한 주요한 조형인자는 색과 면보다는 선, 즉 운필에 집중 되어 있다. 흰색 아크릴 물감을 바탕으로 하여
그어진 졸박한 필선의 유희는 존재 일반의 존재성을 향한 천착 하에 순수의 극단으로 진입해 간다. 또한 근원적 색으로서의 흑과 백의 화응과
변주 역시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는 치밀한 조형적 계산이나 의도성을 배제한 채 즉흥적 영감이나 느낌을 통로로 하여 물감을 바르고
먹을 입히고 다시 형상을 그리고 지우는 지난한 반복의 과정을 지속한다.
화면에서 드러나는 운필의 개성은 모필이 아닌 나뭇가지나 막대기를 사용함으로써 나름의 독창성을 확보한다. 선의 굵기나 각도, 고저장단에 따른
필선의 강약대비는 보일 듯 말듯 한 형상과 공간의 긴장 관계 속에서 시각적 여유와 깊이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적막한 시공(時空)을
가르는 간결하면서도 고졸한 감성의 빛깔을 유발하는 필선의 울림이 생략에 의한 개략적 묘사의 묘미를 창출하면서 화면에 속기(俗氣) 없는
고적함마저 실어 내는 것이다. 거기에는 바람소리, 그늘과 같은 소슬한 기운에서 발아하는 문사(文士)적 운치와 내밀한 인격의 표상마저 현현
되고 있다.
나아가 간이한 형상너머로 드러나는 여백으로서의 공간은 흑과 백, 허(虛)와 실(實)의 변증적 미감의 창출만이 아니라 화면을 초연한 깊이감과
미묘한 뜻이 담긴 묘경의 경지로 끌고 간다. 예컨대 성글고 간소한 운율이 산수와 마주한 작가의 초연한 심경만큼이나 속기 없는 음성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순연한 정감(情感)의 세계를 일깨우게 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발현해 낸 화경은 풍경을 기조로 하여 주관적 심상으로
재구축한 내면탐구의 결과물이자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우직한 정공법(正攻法)에 따른 조형적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삶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형성되고 있는 반목과 갈등 ․ 괴리감등은, 흔히 말하는 물질 만능주의, 속도 위주의 현대 사회니
하는 등등의 보편적인 모습의 형태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나 자신 스스로가 다양하고 복잡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유행에 민감한
가치관의 변화나 자극적이고 즉물적인 것들을 쫓는 오늘날 사회 분위기들을 체감하면서, 모순된 이중적 삶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현상의 모습들은
나 자신 스스로로 하여금, 자연이 가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순환의 질서와 정화의 기능적 측면들의 모습들을 통해서, 감성을 회복하고 치유의
기능들을 작동시키기를 원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의 순 기능적 역할의 측면들을 나의 조형적 언어의 소재로 삼아서, 자연의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형상들(꺾이고, 밟히고,
흔들리고, 그늘진 등등의 )인 소외된 풍경(소외된 풍경이라 이름하고)들을, 비유적이며 은유적인 화법으로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괴리감과
자괴감,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억눌리고, 절제되고, 일그러진 등등)의 형상들을 묘사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작업 방법에 있어서 선(드로잉)의 그 어떤 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사실적 혹은 구체적 형상을 버리고, 처음 사물(自然物)에서 느낀 이미지들을 내
자신의 순수한 감성으로 접근해서 표현하고자 했다. 사물(自然物)들을 내가 인식한 내 의식들 속의 순수한 감각들을 동원해서, 그
사물(自然物)이나 대상에 접근하여 마침내 그 정점에 도달하며, 비로소 맞이하게 되는 그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에 접근해 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사물(自然物)이나 대상들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표피적인 인식들에서 보여 지는 사물(自然物)의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해체해 들어가면, 그 사물(自然物)의 본질에 근접할 것이며, 작가
본인의 진실성이 증명되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믿기로 했다. 반면, 그 사물(自然物)과 대상들을 표피적인 인식 속에서 닮게 그리려고
한다면(닮게 그릴수도 없지만), 오히려 그 대상의 생명력을 잃게 만드는 것 일테므로....
“작품은 환영(幻影)을 주기 위함이며, 따라서 그 환영의 본질에 충실했을 때 그 대상에 접근한 것과 같은 환영을 주는 것이다,” 라고 자코메티는
말했다.
세잔이나 자코메티는 사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사물을 닮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물 본질과는 상관없이 닮게 하려는 의지만 남아서 그것에
매몰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즉, 닮게 하려고 할수록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만 남아서 표피적 형상만 만들어지게 되고, 사물의 본질에는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을 닮게 그리는 것을 버리고, 사물이 가지는 본질적인 이미지, 즉, 작가 본인이 느끼는 감성에 충실해서 사물을 표현하려는
수많은 실험을 했다.
그들은 회화의 표현적 방법에 있어서도 기존인식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들을 버리고, 그들이 말하는 대상본질에 접근을 꾀하기 위해서, 회화의
기본을 선(드로잉)으로 보는 시각들을 굳히게 된다.
내 작업들 중 선(線)으로서의 조형적인 표현의 태생을 이들과 같은 맥락 속에 의탁해 보았음을 숨기진 않겠다. 이른바 선의 구체적인 표현을
모색하는 가운데 자연물(自然物)이 가지는 형상성을 선의 요소들로 구현하려 했음은 여기에 근간한다. 작업의 진행에 있어서 질감과 양감을
버리고, 기본이 되는 선(드로잉)으로 돌아가는 것은 덩어리, 면 또는 색채 이전에 대상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선이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작업 방법 또한 채색하고 먹을 입히고, 형상을 그리고 다시 지우고, 또다시 채색, 형상, 지우기, 그리기.......이런 지우고 그리고 하는 과정들의
반복을 통해서 사물이 가지는 본질적인 형태에 접근해 보려함은 이와 같은 동일한 맥락이다. 하지만 이미 보편화된 소재(自然物)를 이용해서
선(線)의 형상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조형적인 표현 수단으로 선택한 소재(자연물)가 진부한 형식으로 인식되어 질수 있다는 것과 사고의
편리성으로 보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상을 의식하는 나의 사고가 구체성을 갖지 못한다면, 조형적인 표현 수단으로 선택한
소재(自然物)는 화면위에서 모호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보여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곧 사고의 현실적인 감각을 키우고,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통해서 극복해 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