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 타자와 상호 작용하는 주체"
고충환 (미술평론가)
주체란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서 환원되지 않는다. 상황이 주체를 낳고 의미를 낳는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내가 맞닥트리는 상황들로부터 매순간 새로이 태어나고 갱신된다. 나를 정의하게 해주는 의미 역시 그러하다.
나는 상호간 이질적인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관습과 관례, 교육과 문화의 소산이며, 그 지층으로부터 건너온 온갖 차이 나는 타자들로써 구조화돼 있는 것이다. 민경아의 근작에선 패러디가 두드러져 보이는데,
바로 나, 주체, 자아를 형성시켜준 인문학적 타자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가운데 메인에 해당하는 작품이 (Ongoing Supper)로서, 총 세 가지 다른 종류의 버전이 제시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이 연작은 다 빈치의 만찬 그림이 과거형이나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암시한다. 이는 미술사를 결정적인 의미로 굳어진 닫힌 체계로 보기보다는, 이를 대면하는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이 갱신되고 수정되고 변형되는 열려진 체계로 본 것이다. 13명의 등장인물들을 원화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데, 다만 실루엣 형상으로써 인물들을 익명적인 주체들로 전환시켜놓고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놓인 식탁 위의 만찬을 위해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화를 차용하거나, 나아가 스타벅스와 바나나 우유 등 동시대적인
아이콘마저 끌어들인다. 종교적인 아이콘으로서의 만찬과 조선시대 풍속화 속 만찬 그리고 현대인의 만찬이 시공간을 초월해 공존하는가 하면,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의 문화적 지층이 충돌하고 삼투된다.
한편, 작가는 이 모든 그림들을 리놀륨 판화로 제작하는데, 회화로 그려진 원화를 일일이 판화로 옮겨 그린 것이다. 이를 위해선 회화적 표현, 이를테면 중첩된 터치와 입체적인 볼륨감 그리고 음영처리를 일일이 최소한의 면과
중첩된 선으로 옮기는 과정이 요구된다. 그 과정이 원화 그대로를 옮겨 놓는 것이 아닌 만큼 고도의 감각이 요구되며, 나아가 그 자체를 적극적인 해석행위로 볼 수 있다. 회화를 판화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단순한 복제가
아닌, 재창조의 계기로써 작용한 것이다.
이로써 민경아는 복수 제작된 오리지널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재배열하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하나의 이미지가 새로운 의미, 전혀 다른 의미로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