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ism





추상과 자연

조광석 (미술비평가)
갤러리 원 (2000. 11.)



95년 서성록은 임태규의 전시 서문에서 동양인들이 지닌 자연성을 말하고 있다. 대다수의 동양인들은 자연에 대해 수동적이며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는 자세로 해석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작가는 오랫동안 자연적인 사고와 표현, 그리고 내면적인 준비에 노력하고 있었다. 필자는 작품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으로서의 임태규 자신의 경험 위에 쌓아올리는 자발적인 행위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동안 그의 작업은 자신에 감추고있던 격정적인 힘을 드러내는데는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작가의 내면에 지니고있던 계획되지 않은 자연의 힘으로 인식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작업에서는 많은 것들이 침잠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일부 작품에서 나타나는 물감이 종이에 스며들고 그 위에 겹쳐진 투명물감의 결과들이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최근의 색면들의 컷팅으로 이루어진 꼴라쥬 형식은 새로운 변화를 느끼게 하고 있다. 이는 이전에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이 행위에서 자연적 발상에서 시작된 반면에 근래의 작업은 의도적인 형태들의 조합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초기의 자연 발생적 형상(figure)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지시하기보다는 그것이 실제의 사실과 다른, 작가 내면에서 돌출 된 형상을 암시한다. 그의 형태들은 내면으로부터 발생되는 메시지가 작가의 손을 통해 형태와 물감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동성을 의미한다. 우연히 만들어진 형태에서 반사되는 물감의 빛은 캔버스 위에 다른 모든 것과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제 위치에 놓여지고 또 다시 독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한 형태들의 조합은 의미를 지닌 표상을 이루고 표상은 형과 형의 조합으로 중심과 주위와의 상관관계를 제시한다. 그때 화면 위에 흐르는 빛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예술의 빛으로 전환된 것이다.

최근의 추상 작업은 사물의 공통적인 속성을 찾아내고 개략적인 표시로 제시하기 위해 단순화와 재조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형상과 이미지의 관계에 도달하게 된다. 완전한 추상이 이루어 질 때 이제 작가가 탐구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과 반응하는 내면의 것으로서 심미적 자연이 된다. 작가는 유기적인 것을 무시간적인 작품 안에 영속시키기 위해 비유기적인 법칙에 의존하게된다. 여러 가지 형태를 의도적으로 구축하는 방식에 가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작품제작의 형식에 작가의 의도를 의존하는 방식이다. 이미 임태규의 작업은 그러한 형식의 의존도가 높아져있다. 말하자면 시각상의 특정형태에 대한 폐쇄성을 형성하고있음을 보게된다. 그것은 대다수 회화가 시각상의 공간에 의존하던 방식이 아닌 형태의 기호적 역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초기에 있었던 자연 발생적 힘과는 다른 양상을 보게된다. 오히려 본래 추상의 필연적인 전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원리에 접근하게된 것이다. 초기에 보여주었던 자연에 대한 자기발생적 시도가 본능적 감수성에 의존하고 있었다면 이제 추상 작업의 근본적인 이해를 추구하게 된다.

임태규에 있어서 추상형태의 형식화는 좀더 다른 가치에 대한 전환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형식화는 작가의 예술 의욕이 대다수 감추어지고 표현에 있어서 내면화의 과정으로 나타나게된다. 그렇지만 많은 작가들이 오랜 동안 내면화를 노력한 결과 현대미술은 아주 어려운 국면에 놓여져 있음을 작가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말하자면 관객과의 소통은 좀더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게 되고, 작품의 깊이는 작가에게는 더 넓은 세계를 제공하였지만 관객들에게는 막연한 감성의 분리만 맛보게된 것이다. 예술 의욕은 작품이 발생하기 이전에 의식적 목적을 갖는 충동이라 해석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시대에도 존재하고 각기 다른 예술형식에 변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자연의 원형에 접근하려는 소박한 전제에서도 존재하는 내면의 필연성이기도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변화에 대한 욕구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 결국 관객의 이해를 초월하는 이러한 추상작업의 어려움보다 비교적 부드러운 인간적 분위기를 갈구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형식에 의존하기보다는 천진난만한 인간 스스로를 만날 수 있는 기대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장식이나 놀이 같이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미 작가의 초기작품에서 발현되듯이 자연에 대한 표현 방식에서 보여주었던 인식의 공감대와 같은 감정의 유사성을 나타낸다. 즉 자연은 표현에 있는 것 아니라 본래 스스로가 지닌 본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즐겁게 행하였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공감하는 작업들이다. 이미 그러한 소질을 이번의 작은 작업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스스로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에 접근하는 태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