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ism





물의 그림

최하림 (시인)
갤러리원 (2005.4.8 -4.21)



한달에 한번쯤, 또는 두 번쯤 임태규의 작업실로 나는 간다. 흰털이 눈을 덮은 강아지를 데리고 가기도 한다. 작업실 문을 밀고 들어가면, 강아지는 데크에서 햇빛을 받으며 나를 기다리고, 나는 작업실 구석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는다. 임태규는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작업에 열중한다. 열중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후광이라 할까 달무리 같은 것이 등 뒤에 서린다.

임태규는 드로잉이 선행된 희고 질긴 순지를 두 손으로 말고 비빈 다음 물감을 푼 물에 적당히 적신다. 이때의 ‘적당히’는 매우 계산된 시간이라 봐야한다. 종이가 물감을 푼 물을 얼마나 빨아들여야 하느냐를 계량하는 시간인 것이다. 임태규는 ‘적당히’ 시간이 지났다 싶으면 종이를 꺼낸다. 둘둘 말은 종이를 펴고 비빈 부분을 잡아당기면서 어떤 효과가 우러나오는지 살핀다. 나는 숨을 죽이고 본다. 종이는 (이제부터는 화면이라 해야 한다) 색이 마르면서 가랑잎의 엽맥과도 같은 가는 선들이 살아나고, 그 선들은 지평선이거나 밤의 대지 같은 대관적 풍경의 어떤 실핏줄이 된다. 임태규의 그림이 평면을 중시하는 까닭이 이에서 비롯된다.

임태규의 최근작들은 그림이 그림을 그린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그림의 재료인 종이가 물감을 빨아들이고, 물감이 마르면서 한편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지 화가가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화가는 거의 이선으로 물러나 있는 것 같다. 화가가 자의로 대상세계를 해석하면서 그리지 않고, 그려지기를 보고 돕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의적 세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봐도 된다. 그리하여 임태규의 화면에는 저녁 어스름과도 같은 회색조의 침전물이 끝없이 깔린다. 이것은 김지하의 용어를 빌자면 ‘흰 그늘’이라 할 수 있고, 타니자키 쥰이찌로의 용어를 빌자면 ‘음예’(陰翳) 의 무늬라 할 수 있다. 음예란 어둠이 빛과 어울려 거미줄처럼 서리는 풍경을 말한다. 즉 멀고 희미하고 두텁되 아래로 가라앉는 그늘이다. 임태규의 그림은 물론이고, 그림을 그릴 때의 임태규 자신도 그늘로서 거기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삼차원이나 혹은 사차원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는 이차원적인 평면도 거부하려고 한다. 그의 그림은 ‘흰 그늘’을 넘어서서 白紙이고자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그의 ‘지평선’이나 ‘밤의 대지’는 계산하고 계산하면서, 그리고 또 그리면서 얻어낸 결과물이라기보다 ‘우연’이 십분 작용한 그림이라 해야 할 것이고, 여백과도 다르고, 無와도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한 것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임태규의 모든 작품들은 빈 구석이 없다. ‘흰 그늘’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때문에 그것은 밤도 아니고 새벽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고,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닫쳐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시 찬찬히 화면을 보노라면 ‘흰 그늘’속에는 보이지 않게 시간들이 움직이고, 우리가 살아온 기쁨이거나 혹은 슬픈 역사가 음영으로 깔린다. 그 음영은 분명히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어스름이 낀 지평선은 과거와 현재의 꼬리를 물고 뱀처럼 보이지 않는 타원형을 그리면서 돌아가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은유라 하기도 어렵고 제유라 하기도 힘들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임태규의 그림이 원근법적 세계를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그것의 잠재의식이 스스로를 변화 시키고 변색해 간다는 면에서 고전적 세계를 완전히 일탈했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흰 종이의 중심 부분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부빈 뒤, 물감을 푼 물에 적신 드라이플라워와도 같은 작품들을 보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이 꽃은 혹은 꽃의 흔적은 중심으로부터 수없이 가는 선들이 변으로 퍼져나간다. 가는 선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되는 이 그림들은 가볍다 못해 落花처럼 간신히 캔버스에 얹혀 있다고 해도 된다. 그 꽃은 지금 떨어져내리고 있거나 無로 돌아가는 찰나에 있다. 그 꽃은 색도 면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그림이 색과 면을 버리고 존재할 수 있겠는가. 예술가가 색과 면이라는 전통적인 세계를 거부하고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은 전통을 개신하고자 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임태규의 꽃들은 캔버스 위에 부착된 다음, 마지막으로 물로 씻어내고 씻어내는 작업을 거듭한다, 그러고 나면 지평선 연작들과 한가지로 ‘음예’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평선 연작들도 마지막으로 물로 씻어내기를 거듭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실로 이 화가의 작품들은 물로 시작해서 물로 마무리 된다고 해도 된다. 물의 상상력이 작품들을 ‘음예’의 세계에로 운반해 간다고 해도 되는 셈이다.

임태규의 작품들은 십여 년 동안 개신에 개신을 거듭해 왔다. 처음 그는 거의 충동적으로 코발트색 물감을 화면에 내리 쏟아 붓더니, 서예의 行草体와 같은 선을 검게 또는 푸르게, 갈색으로 그어 댔으며(1995년), 회화적 방법이 전혀 다른 두 개 또는 세 개의 면을 마주 붙여 이질적 조화감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2000년). 그런 여러 변화와 변주에도 불두하고 (서성록이 지적했듯이) 그의 그림들은 꾸밈이나 조작이나 파괴가 없이 자연대로 넘치거나 유동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이번 전시 작품들에도 그런 넘실거림이나 유동함이 내면 깊이 가라앉았다고 해야겠지만, 지평선 연작이나 꽃 연작들을 오래 보고 있으면 시간의 물결이 한없이 흘러가는 소리 들린다.

물로 시작해서 물로 마무리 지은 저 지평선의 소리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무어라 단정하기 어렵다. 화가 자신도 그것이 무어라고 단정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 않다. 그런 대표적인 존재가, 어스름이 짙게 깔린 두개의 캔버스 위에(그 두 캔버스는 맞붙어 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거나 우리의 행로를 가로 막는 것 같은 검은 그림자가 중심에 배치된 작은 그림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 무어라 화답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 그림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아! 하고 가느다랗게 탄성한다. 참으로 이름 지을 수 없는 그 작은 그림은 아름답다! 화가는 물이 그려낸 물로서 흘러가는 어스름속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기 바라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매우 老子적이다. 노자는 말했다. 물은 형태 지을 수 없고, 그러므로 이름 지을 수도 없다고.

물은 흘러가면서 변하는 것이라고...
(이 글에서‘지평선’이나‘꽃’은 화가가 지은 작품 이름이 아니고 필자가 편의적으로 붙인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