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ism




이십대의 사회적 초상과 자기애

김성호(Kim, Sung_Ho, 미술평론가)



I. 불안한 중성성 - 이십대의 사회적 초상
작가 김경옥은 이십대의 사회적 초상을 그린다. 인터넷과 대중문화의 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십대의 다양한 이미지를 채집해서 재해석된 팝아트의 조형 언어를 구사한다. 특정 상황을 선보이고 있는 인물 형상과 엷은 층의 물감을 올려서 비교적 정밀하게 묘사하는 구상의 형식 그리고 그 뒤에 대조적으로 배치된 기하학적 패턴의 배경과 그것이 창출하는 일루전의 효과는 미디어 시대로 규정할 수 있는 오늘날 이십대의 자기애로서의 욕망과 사회적 초상을 시각화하기에 족하다.

먼저, 출품작들이 함유하는 중성성(neutralité)은 오늘날 이십대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생각해 보자. 중성성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경계를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고 ‘이것/저것’의 경계를 한데 아우르는 혼종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이가 성년기에 접어들었으나 정체성은 미성년과 성년 사이를 오가는 무엇 하나 확실한 것 없는 미래를 사는 이십대의 불명료하고 불안한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중성성은 시각적으로 소녀/소년, 수줍음/장난기처럼 ‘이것/저것’이 혼성된 무엇으로 나타난다. 특히 여성과 남성의 분별 가능한 성적 정체성은 그녀의 작품 속에서 중성성 속에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는 경우가 다반사다. 동일한 헤어스타일과 복장을 한 남성과 여성이 마주하고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쌍둥이 같은 이들은 서로의 성징이 교차하는 중성성의 의상과 외양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성 역할이 전도되는 오늘날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가시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경옥의 많은 작품 속 등장인물은 때론 웃거나 슬며시 미소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감정 상태가 어떤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미묘한 ‘중성성’, 그것도 ‘불안한 중성성’의 상태를 드러낸다. 그것은 ‘웃고 있어도 웃는 것이 아닌 이십대’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상황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다수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아슬아슬하게 옥상 난간 위를 걷는 위험한 모험에 탐닉하는 청년, 수많은 길 앞에서 방향을 잃은 듯 서 있지만 확고한 의지를 표현한 뒷모습, 알수 없는 비정형의 상황 앞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는 뒷모습 등 다소 해학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 등장인물은 불안한 중성성의 상황을 연출한다. 대개 그것은 무표정, 무관심의 상태이거나 양자를 혼성하는 ‘교착 혹은 균형(standoff)’이 혼성된 중성성의 상태로 가시화된다. ‘침체/평온'이나 ‘고요/우울’이 그리고 ‘번민/설렘’ 혹은 ‘불안/흥분’이 뒤섞인 채로 말이다. 가히 ‘불안한 중성성’이라 할 만하다.

II. 인식론적 실천 - 봄에 더 많이 하자
작가 김경옥은 선택과 포기의 안팎을 지내는 현재의 이십대를 흥미롭게 선보인다. 그녀가 선보이고 있는 작품 (춥다, 봄에 하자)(2019)는 의미심장하다. 남녀 한 쌍이 방 안에서 옷을 벗고 있는 긴박한 순간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 누군가의 발화(發話)는 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오염시키고 이내 우리를 아련하게 만든다. “춥다. 봄에 하자.” 영화 〈소공녀〉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사다. ‘너무 냉방이라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과도 같이, 비루하고 궁핍한 현실을 사는 이십대를 얼마 전까지 우리는 ‘N포 세대’라 불렀다.

오늘을 사는 이십대는 프랜차이즈 가맹점 아르바이트에 나서면서 청년 세대의 갑갑한 고용 현실을 피부로 절감한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이성에 대한 관심과 열정, 내일 대신 오늘이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신명나게 보내는 무모함마저 그들의 삶에는 녹아 있다. ‘소소하게 낭비하며 느끼는 재미’를 일컫는 ‘탕진잼(蕩盡잼)’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여 일컫는 ‘소확행’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이십대의 초상으로서 말이다. 탕진잼과 소확행을 즐기는 오늘날의 이십대를 우리는 ‘현재를 즐기는 젊은이의 삶의 방식’을 은유한 ‘욜로(YOLO)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명이 드러내는 “춥다, 봄에 하자”는 결코 포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오늘의 현실을 직시한 ‘존재론적 자각(自覺)’이자, 내일을 위한 ‘인식론적 계획’을 내포한다. “추우니까, 봄에 더 많이 하자”는 의미로서 말이다.

III. 미디어 초상의 욕망과 자기애 - 빛나지 않으면 또 어때
김경옥의 작품 속에서 추적하는 이십대의 모습은 소비 사회의 미디어와 늘 함께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것은 나이키나 스타벅스, 코카콜라, 겐조와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한 다국적 기업의 브랜드나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과 같은 미디어가 생산하는 디지털 콘텐츠를 담는 SNS의 세계와 같은 것이다. 인터넷,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한 오늘날 이십대는 스마트폰 없이 살 수 없는 미디어 세대로 가히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 할 만하다.

작가는 방탄소년단(BTS)의 구성원인 알엠(RM)과 지민(Jimin)의 초상을 그린 최근작에서 유명 아이돌과 대중 스타에 대한 이십대의 팬덤(fandom) 현상을 추적한다. 오늘날의 이십대는 덕밍아웃(덕ming-out)을 통해 자신이 대중스타의 열광적 지지자임을 공개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십대의 팬덤 현상은 더는 수동적인 소비자만이 아닌 유행의 최전선을 만드는 생산자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이십대가 몰입하는 팬덤 현상은 ‘자기애’의 또 다른 변형임은 물론이다. 이들의 자기애는 예비 스타를 지원하면서 대리 만족하는 ‘양육자 팬덤’을 넘어 유튜버, 스트리머, 틱톡거, BJ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미디어 초상’을 생산하는데 한 발 더 나선다. (작품 빛나고 싶다) (2020)는 반짝이는 보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이십대 여성의 초상을 통해서 ‘보석처럼 빛나고 싶은 이십대의 자기애라는 욕망’을 추적한다. 지독한 ‘자기애’는 삶을 위한 욕망의 첫 출발점이다.

프로이트(S. Freud)에 따르면, 인간 행동이란 생물학적 충동과 본능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욕망에 의하여 동기화된다고 주장한다. 본능적 욕구를 잉태하는 무의식의 층위인 ‘이드(Id)’는 자기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 작품이기도 한 (LOVE YOURSELF) (2020)에서 시지프스로 가득한 도시의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이십대의 강렬한 눈빛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하나의 선언적 아포리즘이 된다. 우리는 이드와 욕망을 억제하는 윤리적인 존재인 초자아, 즉 ‘슈퍼 에고(Super ego)’ 사이에서 현실적 자아 혹은 이성적 자아라 불리는 ‘에고(ego)’가 부단히 작동하면서 욕망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되새긴다. 김경옥의 작품 속에서 이드의 자기애를 누른 채, 잠들지 않는 불야성의 도시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한 청춘의 모습을 본다. 이드의 자기애로부터 에고의 정체성을 회복한 자아처럼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안다. ‘빛나는 미디어 초상’이 되려는 욕망은 현실을 자각하는 ‘에고’의 조정으로 “빛나지 않으면 또 어때”란 자가 위안을 불러온다는 현실을 말이다. 그 꿈과도 같은 욕망을 잠시 무의식의 영역에 묻어두지만 이십대는 오늘도 꿈꾸고 희망한다. 자신의 불안한 정체성마저 기꺼이 사랑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