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in Mokpo, Jeollanam-do in the fall 1965,
Growing up I have interested in human and human issues in particular just like being human the first time in this
present life because of my previous life which had lived the heaven according to my fortune and destiny.
Deepening interest in the relationship or psychological and I have researched history.
While studying the history of human I was concerned with the history of the origins of human life.
Theme of my artwork which is material of the ceremonial burial of Silla, have started from the question about the world
after death.
Life
Death
Karma
Universe’s circulation
Energy
etc.....
I am so various accumulating experience as to do insight about previous existence and after death.
The mental zeitgeist of my painting is based on oriental art.
I always research traditional Korean paper and ink and extensive researching various colors and materials in the world
in order to use without clogging.
Over the ridge of my life which was intense and keen,
I'm blessed with tastes and a susceptible life.
In the future, I will be expressing about my life's wisdom and changes.
I hope my journey is smooth sailing and continuing.
1965년 가을에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나는
천상계에서 살았다는 나의 사주팔자에서의 풀이처럼 마치 이번 생에 처음 사람이 된 듯 어렸을 적부터 사람과 인간에 대한
문제에 관심이 유독 많았다.
관계나 심리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역사를 공부하게 되고,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인간의 근원인 생명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내 작업의 테마는 신라의 부장품을 소재로 한 인간의 사후세계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 되었다.
생명,
죽음,
인연,
카르마,
우주의 순환,
에너지 등
존재 이전과 삶과 사후에 대한 의미가 일생 통찰되기를 공부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
동양미술을 바탕으로 내 그림의 정신적인 사조는 시작되었고 종이, 먹을 비롯한 재료들을 연구, 섭렵하였으며 막힘없이
사용하기위한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격하고 치열했던 삶의 고개를 넘어 다감하고 따뜻한 내 성향과 취향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내 삶의 지혜와 변화들을 줄곧 표현해낼 것이며,
삶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오랫동안
내 그림의 테마가 될 듯하다.
아름답고 그윽한 순조로운 향해가 계속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생명의 역사를 그린다.
관계, 감정을 그렸던 초기작에서 내세를 준비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부장문화를 소재로 존재
이전부터 생명, 인연, 죽음, 순환, 에너지로 귀결되는 생명의 역사를 연구하고 관심사의 진폭을 확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작에서 보여지는 '얼룩'이라는 시리즈로 거시적인 시점에서 내가 살고 있는 행성을 조망하고 있다.
생명의 역사란 결국 인간을 통해 문명이 증거하는 역사의 흔적과 같은 맥락이기도 한 것이어서
지금 생명을 이어가는 자로써 문명의 시작과 소멸, 반복이 보여주는 퇴적의 시간이 주는 느낌과 의미를 다시 반추하는
작업을 한다.
내가 사는 지구의 문명이 시작됐다 소멸하기를 여러차례...
나의 개인사란 은하계에서 지구를 거시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더 심각히 미시적일 미미한 존재일 것이다.
다른 이름이거나 순간은 기억으로 퇴적되어 나를 증명하거나 오늘을 딛게 했지만 문득 부질없는 몸짓이란 물음이 파란
하늘처럼, 마알갛게 내리는 비처럼, 공기 사이사이 퐁퐁 튀어올라 삶의 무게가 진짜가 아니라고 위로를 한다.
시간이 지나 나는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려나...
문득,
심각한 것은 애초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장지에 동양화 채색을 올리는 기법으로 밑작업과 전반적인 작업을 하였다.
그 위에 흘리고 쌓는 작업으로 구상으로 시작해서 그 위에 동안에 진행 되어졌던 기법을 얹는 방식으로 화면에 소멸과
퇴적을 증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세상에 태어나 내이름으로 불리었던 텍스트를 화면에 싸인의 형식을 빌어 남겨놓았는데 문명의 역사거나 개인의 내면적인
기록의 흔적을 '얼룩'이라는 명제로 선보인다.
텍스트를 썼던 재료는 흑연으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산화되며 엷어지며 사라지는 재료를 택했다.
2015년 김은숙
꿈.
얼음 알갱이가 피어난 듯 화선지위에 백반을 두텁게 올려두었다….. 비닐과 십 년을 씨름했다.
외눈박이인 채로 너무 오랜 시간을 멀리와 버린 느낌이다.
거대한 우주를 표류하며 나만의 언어로 만나는 세계는 경이로움과 환희, 때론 감당 할 수 없는 깊은 어둠에 갇히기도 했다.
꿈을 그리며 쫓아간 조형놀음에 이만큼 성장한 자아를 마주 할 수 있음이 행복하다.
방법적인 표현과 재료는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밑바탕에 존재하는 관심사는 우주적인 세계관이다.
내 화면에는 신(神)도 존재하고 은하수도 건널 수 있다.
의도된 우연이 자리하는 화면 위에 일상을 늘어놓고 곰팡내 나는 오랜 얘기들을 곱씹고 있자면 20세기를 살고 있기는 하는 건지.. 누군가
촌티 난다는 악평을 해주지 않을 바에야 나는 또 제멋에 도취되어 한없이 꿈속으로 날아가 버리고야 만다.
얼마 전부터 화면 속의 얘기들은 자신을 드러내주길 원한다. 때론 색(色)을 벗고픈 충동이 일기도 했는데 강박감속에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젊은 시간들에 보상일지 모를 과정이라 여긴다.
추상에서 비구상으로.
그러나 화면에 등장하는 새며, 나비, 일그러진 인간의 군상(群像)은 엄밀히 따져 세상 것 만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꿈꾸는 이의 것이며 새벽과 조우(遭遇)하며 온몸으로 우주를 껴 앉아 본 이만이 만끽할 수 있는 상상의 언어이다.
애정 어린 평화가, 우수에 찬 젊음의 고뇌가, 전생일지 모를 천상과 불가(佛家)의 얘기들이 내밀(內密)한 곰살거림으로 화면을 채우고 노래한다,
작업할 때 누군가 옆에 있는 게 싫다. 방해 받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좀처럼 집중 하기가 어려워 나처럼 산만한 이에게는 조그만
의식이 필요하다. 부족 하기만 한 저를 통하여 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시라고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한다,
늘 직면하게 되는 일이지만 요즘 들어 얼마나 자신이 부족하며 또 부족한지 절감한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병은 첫사랑처럼 불면(不眠)의 쓰디쓴 시간을 요구하지만 기꺼이 감내하리라. 그런 행운이 내 것이라면..
새해에는 미뤄왔던 몇 가지를 시작했다. 앞으로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1998년 김은숙
지구상에 출현한 생물의 역사는 약 38억 년의 시간을 헤아린다.
인류는 약 250만 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고 오늘날의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에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까지
예술품이나 장신구라고 분명하게 이름 붙일 만한 최초의 물건들이 등장했다.
드디어 문화와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호모사피엔스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은 삶을
이루고 예술을 만들고 생의 모든 것을 전개시켜왔다. 개별적인 인간의 몸은 지금까지 살아낸 인류
전체의 기억을 유전인자 속에 각인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삶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다시 복기하고, 추체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개별 생명체가 지닌 무수한 생의 사연과 역사,
생명체의 지난한 투쟁을 모두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엄밀하게 말해 우리는 삶과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재현할 수도 없다. 다만 한 개인이 살아낸 생의 기억과 경험이 있고 그로인해
형성된 인생관과 세계관(파편적일 수밖에 없는)이 있을 따름이다. 하여간 미술행위는 한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일이고 이는 이른바 ‘재현된 리얼리티’의 세계이다.
그것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그 안에는 작가의 삶의 기억과 경험, 세계와 사물에 대한 모종의 인식이
깃들어 있다. 작가 스스로 인식한 생의 이치와 인생의 깨달음이 있으며 그러한 자기 논리의 진정성을
그림 그리는 행위로 증명하고자 하는 일이 미술행위로 이해되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술은 이른바 가치판단의 문제와 긴밀히 연동된다. 따라서 작가들의 주제, 방법론,
미술에 관한 생각들 역시 이 가치판단에 기인한다.
김은숙은 화면에 여러 흔적을 의도적으로 남긴다. 우연적이면서도 불가피한 흔적들이다.
그 흔적들이 모여 그림의 주제, 내용을 만든다. 구체적인 대상은 없지만 그림의 전 과정이 특정한
주제를 암시하고 상징하는 듯하다. 우선적으로 화면은 물감의 층, 흘러내리고 유동하는 자취들,
무수한 몸짓들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그것은 아득한 시간의 결을 암시한다. 동시에 수많은
생명체의 명멸을, 문명의 생성과 소멸을 시각화, 질료화 한다. 그렇게 화면은 단일한 평면이라기보다는
여러 겹의 공간들이 시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포개어져 얹혀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보여주는 동시에
가로막고 있으며 투명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불투명하다. 따라서 평면위에 약간의 높이, 질감으로 융기된
흔적은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거나 암시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자족적인 표현의 상태로 충만하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재현하기 이전의 질료적 상태, 원초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연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물감과 붓질은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기 이전에 그것 자체로 충분히
표현적이고 미술적일 수 있다는 표명이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재현에 반하는 의도적 혼돈이자 우연, 불확실성에
대한 허용이다. 사실 이미지란 결국 재현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덧없는 욕망이다. 따라서 모든
이미지는 진정한 재현에 가닿지 못하고 다만 그것을 암시하거나 은유하는 방식으로 밖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추상미술은 재현미술의 그 부질없는 욕망에 대한 비판적 대응인 셈이다. 김은숙의 그림, 화면은 온전히,
완벽히 재현될 수 없는 개별 생명체의 생의 사연, 삶의 기억, 문명과 역사의 생성과 소멸 등등을 다만 흔적으로
표현할 뿐이다. 표면에 남겨진 일련의 ‘얼룩’ stain들은 "문명의 소멸과 퇴적”을 방증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결국 화면위에 남겨진 다양한 얼룩들은 작가가 인식한, 한 생명체의 시간의 흔적이자 인간의
역사와 문명, 그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은유하는 시각이미지가 된다.
이처럼 모든 이미지는 은유에 해당한다.
장지에 석채와 분채 그리고 글리터를 이용한 작업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재료체험에 바탕을 두면서도 다분히
이질적인 감각을 안긴다. 우선 화면이 전체적으로 균질하게 도포되어 있다. 일차적으로 진한 습성을 간직한
배경이 풍경처럼 펼쳐져있고 그 위로 점, 가늘고 예민한 선, 번지고 스며든 여러 흔적들이 채워져 있고 이것들은
다시 물에 씻긴 표정으로 자리하고 있다.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의 반복이자 형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시간성을
암시하는 배경임은 앞서 언급했다. 그 위로 걸쭉한 액체성의 질료가 조심스레 흘러내리거나 달라붙어 있다.
화면 전체는 균질하게 칠해지고 다양한 회화적 흔적, 시간적 경과로 채워져 있다. 또한 두드러진 질감을 전체적으로
두르고 있고 그것들은 마치 화면 내부에서 빛을 발하듯이 반짝인다. 이 반짝임은 글리터를 통한 효과이다.
한편 배경과 표면은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막막한 깊이를 지닌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준다.
물감이 스치고 흐르고 머물고 엉겨 붙은 자취가 있고 다시 그것을 투명한 색채로 덮고 그렇게 몇 겹으로 쌓인 화면위로
우연히,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듯한 물감, 질감이 얹혀져있다. 물감은 여러 방향에 의해(사각형 화면의 각 방향으로)견인되다
멈춘 듯이 연출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붓질이나 인위적인 힘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조건에 의해 순응하는
그림이 되었다. 시간과 속도, 중력 등에 기인한 것이다. 희뿌염한 배경을 뒤로 하고 중심부에는 심장이나 몸의 어느
기관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선들이 집적되어 부유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지워지고 스러지는데 최후의 선 인양 살아남은
자취들은 그 무엇인가를 간절히 재현하려다 멈춰선 것도 같다. 생명체의 기관, 세포나 조직의 단면 같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형상과 화면 연출을 통해 작가는 생명체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 문명의 생성과 소멸이 자아내는 무수한 자취를
무성하게 시각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명명할 수 없고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진실 된,
생의 리얼리티를 간직한 개별 생명체의 생의 흔적들 말이다.
The principal subjects kim EunSook takes in her works of art include
relics of the Silla Dynasty such s burial mound figures, lotus flowers, duck-type earthenware,
arabesque floral patterns, Bosang floral patterns, heavenly being images, etc. In the exhibition
at this time, Bosang floral patterns, heavenly being images, arabesque floral patterns, etc.
appear as new subjects. Kim Eun-Sook is impressed by the beauty which is contained in the
historical codes of Silla. And she tries to reinterpret the impression with her works of art.
That is, she is moved by the beauties reflected from the cultural depth of Silla with delicacy,
brilliance, and diversity.
Of this impression, Kim Eun-Sook says, "I attempted to approach to our Korean culture with the
beauty of the Silla Dynasty. Silla represented as its culture the Buddhist Avatamska world,
also called self-reliance faith. In particular, I feel indescribable impression in such
cultural relics as heavenly being images of the god bell at the time of Seondeok the Great, the
12 animal images, Bosang floral patterns, arabesque floral figures, etc."
One of the characteristics represented from Kim Eun-Sook's works of art is the frequent use of
lines. As a matter of fact, the line is one of the central expressions in the traditional
expression of Korean painting.
Western painting depicts things with sides or colors externally and objectively, while Korean
painting puts emphasis upon the internal spirituality that forms the externality of things. The
line is emphasized as a spiritual expression. Western painting expresses by coloring external
sides of things using colors, whereas Korean painting depicts the spirituality of things with
lines using brushes. Kim Eun-Sook's usage of the line is far distant from the expression of
traditional lines, as represented from Korean painting. Unlike the expression of lines
representing spirituality, Kim Eun-Sook's painting is said to be congenial to Western material
linear expression. The lines Kim Eun-Sook uses are short but have varied colors. They disclose
repetition similar to that of drawing, as shown in Western painting. The small lines repeated
are continuously listed or layers, which thus makes a thickness and then the texture of the
picture.
Lines in Kim Eun-Sook's works of art give a feeling as if threads are put in several layers.
Innumerable lines and complicatedly entangled lines are tangled up like a textile web woven with
several colored threads. The entangled lines show the images she wishes to represent. The images
appear entangled in the web at one time and at another confined to the web or disclose
themselves. Therefore, line is a time, a history or a relation. And lines become the dissolution
of a form at one time and at another a fundamental base that makes a new form. That is, forms
come dissolved at one time due to the repetition of small lines and at another make a new form
through the lines. The expression of such lines is seen to subside to a certain extent at this
exhibition. The images that are felt from lotus flowers, heavenly being images, patterns, etc.
are more intensively shown rather than those felt from the web of short lines. Her works include
some which depict images using silk screens. She expresses Korean painting but resolutely
introduces Western expression for the communication of the effects and images of the Korean
painting. As aforementioned of Kim Eun-Sook's of works of art, they are presumed to have some
past-oriented aspects in their subjects or materials in some degree. However, inquiry into the
consciousness of beauty should be handed down incessantly, especially today when a overwhelming
digital age is prevalent. The expressions depicted using lines in her works give an advance
notice of a new start. Taking advantage of this exhibition, she is recommended to be oriented
towards a new and more expanded expression, aside from being confined to the boundary of
materials.
김은숙의 선(線)에서는 한국화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선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한지 속에 스며들면서 그 정신성을 나타내는 선의 표현과는 달리 오히려 서양의 물질적인
선의 표현과 가깝다. 김은숙이 사용하는 선은 짧으면서도 다양한 색채를 지니고 있고, 마치
서양화에서 나타나고 있는 드로잉과 같은 반복성이 보여지고 있다. 그리고 반복성 속에서 되풀이
되는 작은 선들은 계속적으로 나열하거나 쌓아서 두께를 만들고, 나아가 화면의 질 감을 만드는
것이다. 미술 표현으로서 어떻게 우리의 전통성을 찾을 수 있으며, 계속 이어갈 것인가 하는
노력은 계속 이어져 왔고, 또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전통성을 찾는 작업은 결국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 탐구로 이어진다. 미술 표현에 있어 한국의 전통미는
어떻게 추구하여야 하고 어떻게 논의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모범 답안은
지금까지 없는 셈이다. 단지 많은 논자들이 한국 미를 언급하면서 그 언저리들 만 요란하게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기술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사이버 문화 속에 서
전통미를 구체적으로 확정시켜 형상화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워져 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화를 제작하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전통미를 통한 표현은 가볍게 넘어갈 사안은
아닌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자기 정체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이 물음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전통미와 동시대성을 동시에 추구 한다는 것은 서로 모순
되는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탐구를 멈추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계속적인 탐구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김은숙이다. 김은숙이 계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전통미를 동시대적으로 어떻게 재해석해서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미를 우리의 고대국가인 '신라'시대에 이루어졌던 문화에서 찾는다. 곧
신라시대의 문화에 서 나타나는 미의식들을 오늘에 반추시켜 재해석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형상화
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1, 2회 개인전(1999, 2001: 공평 아트 센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번
작품전에서도 그러한 전통 미에 대한 연구는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은숙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소재들을 보면 토용, 연꽃, 오리형 토기, 당초화문, 보상화문, 비천상, ... 등
신라시대의 유물들이 소재로서 등장한다. 이 가운데 이번 작품전에서는 보상화 문이나 비천상
당초화문 등이 새로운 소재로써 등장하고 있다. 김은숙은 신라의 역사 코드에 담겨있는
아름다움에 감동 한다. 그리고 그 감동을 작품으로 재해석 하려 한다.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며
다양함을 지닌 신라의 문화적 깊이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들이 김은숙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러한
감동에 대하여 김은숙은 "저는 찬란하게 꽃피웠던 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우리문화에 접근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자력(自力)신앙이라 일컫는 불교의 화엄세계를 문화로서 나타내었던 것이
신라였습니다. 특히 문화 유물들인 비천상, 12지신상, 보상화문, 당초문, 등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김은숙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선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 실상 한국화의 전통적 표현에 있어서 선(線)은
중심적 표현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서양화의 표현들이 사물을 면으로 또는 색채로써
외형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나타내는 것이라면 한국화에서는 사물의 외면을 이루는 내면의
정신성을 더 중요시하며 그러한 정신적 표현 방법으로 선의 표현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곧
서양의 표현들이 색 재료를 이용하여 물질의 외형적인 면을 칠하여 쌓아 올리면서 표현한다면,
한국화에서는 붓을 이용하여 선으로써 사물의 정신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The paintings of Kim, Eunsook are full of lines Long and little lines from a net come in the form of a complicatedly tangled skein of thread, spreading something like a unique scene densely woven with lines. It reminds me of the sight that spun sugar was made by a man's foot movements when I was a little boy. That is a strange memory that sugar bloomed out into the form of cotton. Or we can see a bunch of lines layer in many foils like a cocoon or a web. Those lines disentangled from a representative purpose occupy the scene and fill it physically and with texture. Those lines fail to settle themselves on the scene but only wonder uncertain where to go. They are spinning themselves round. They seem to me a kind of object of lines. Lines spread over the scene emerge as the most original and primary traces. A line may be the beginning of a picture and at the end of the line an extension of another picture. If so it seems that this artist nihilistically repeats painting acts that may bone with a single stroke. In a way, it seems that such a stroke can conceive the beginning of the frankest picture. Furthermore such lines of hers are viewed as very heterogeneous from those used in the existing oriental painting. In fact lines in Oriental painting express the tendencies and symbols of existence using lines by a brush. In order to grasp the tendencies and symbols she uses Indian ink the most appropriate medium. This is because Indian ink has its own unique world fit to establishing lines as they are. Kim EunSook's lines depending upon varied colors layer on the paper are neither able to be sunk into among nor be absorbed by tissues of the picture but each vividly disclose individualities. As aforementioned those lines are only finished with the lines themselves. They reveal the spontaneity of the line and the nomad live of the line that does not depend upon anything.
The operation of such lines may be said to control the whole picture on two dimensions. One dimension leads us to watch the whole picture only with breaths of intermittent lines. It covertly keeps itself away from our general expectations to the picture. That is, the lines are a form, a texture, a line, a side, a picture, a scene, an object, and a background. The visualization of the coexistence of the lines may be thought to be her genuine work of lines. The other dimension sees that the lines play a role as a curtain. Pictures on which lines are regularly drawn strongly stimulate such a feeling. This means that they are feasible as a device to show us traces of time layer in many folds, traces of history folded in layers, the past, the present, etc. The pictures are filled with varied traces and pieces of the past time covered and put on by lines. Her paintings consistently express an interest in history. The emergence of clay figures and lotus flowers indicates a kind of revival and wishes for Buddhist temples or symbolizes desires for the hereafter. The image of clay figures thickly perfuming desires of and eagerness for affluence will be a sentiment or the power of the image that gives sympathy beyond time and space. The work processes that lines are filled on the elaborately made base scene, clay figures, ducks, lotus flowers, fish, etc. are painted with clay, acrylic, or color, or clay figures pictures are taken on silk screen, strongly perfume implicitly things in the past, a nostalgia for tradition, a recollected and reaction concerns. The composition of picture and methodology hypothesize her messages towards such time and history. The artist expresses a keen interest in those who lived in the past and their human way of life and traces. Are the visualization of innumerably many days and times not disclosed as tracks of lines? If so, every line drawn may count for a history with traces and remains of the past time. The action by which Innumerable lines are drawn may be an attempt to call forth into the painting actions and experience once more such time and history. We have experienced human life by reproducing history in our bodies. Thus, we perceive that we are human beings existing at a certain time zone in history or on an extended line. Painting is nothing more than an action really realizing such perception. Today Kim, EunSook's work links her concerns with painting. Painting is work like the performance of daily routines and seems possible as a site to endlessly ruminate one's own existence. Painting as such work and as a practical site is extant after all as one picture. Painting contains in itself implications which are elaborately considered and supported by eminently formative elements. Perhaps, such a point is thought to be the subject of this artist.
김은숙의 화면은 자잘한 선들로 가득 덮여있다. 길고 작은 선들은 그물망을 이루고 또는 무수히 얽힌 실타래를 만들어 흡사 촘촘히 선으로 짜여진 이상한 풍경을 펼쳐보이고 있다. 어린 시절 아저씨의 발놀림에 의해 솜사탕이 만들어지던 그런 정경이 떠오른다. 설탕들이 그렇게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던, 희한하던 기억말이다. 혹은 누에고치나 또는 거미줄 마냥 겹겹히 쌓여진 선들의 다발들을 본다. 재현적인 목적에서 풀려난 그 선들은 다만 화면을 점유하고 물리적으로, 질감적으로 채우고 있다. 그 선들은 화면 위에 안착하지 못하고 그저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뿐이다. 종이 위를 그렇게 맴돌고 있다. 그래서 내게는, 그 선들이 일종의 오브제로 보인다. 화면을 덮어나간 선들은 그 림그리는 행위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흔적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선이야말로 그림의 시작이고 그 선이 끝나는 지점이 또 다른 그림의 연장이다. 그렇다면 이 작가는 단 한번의 붓질로 마감되는 그림그리는 행위를 허무하게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도 같다. 어쩌면 그런 무모한 붓질이야말로 가장 솔직한 그림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도 같다. 또 하나 그녀의 그 같은 선은 기존 동양화에서 보이는 선의 쓰임 하고는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동양화의 선이란, 용필이란 선을 사용해서 존재의 경향을 나타내는 일이고 존재 의 상징을 나타내는 일이다. 경향을 포착하고 상징에 다다르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매체인 먹을 사용하는 것이다. 선을 선으로서 확립시키기 위해 그 자신의 세계만을 가지고 있는 먹이 적합했던 것이다. 종이 위에 올려진 김은숙의 여러 다양한 칼라에 의존된 선들은 화면의 조직 사 이로 스며들거나 흡수되지 못하고 그 낱낱의 개별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선들은 오로지 그 자체로서 마감된다.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으려는 선의 자발성, 노마드적 선의 삶이 감촉된다.
그 같은 선의 운영은 화면 전체를 두 가지 차원에서 조율하는 셈이 된다. 첫째는 화면 전체를 단속적인 선들의 호흡으로만 보게 한다. 그림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 기대를 슬며시 저버리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그 선들은 형태이자 질감이고 선이자 면이고 그림이자 화면이고 대상이자 배경인 셈이다. 그 둘의 기묘한 공존을 가시화 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녀의 선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또 하나 그 선 들은 일종의 막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선들로 채워진 화면에 줄들이 일정하게 그어진 그림들은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자극한다. 겹겹 이 축적된 시간의 흔적과 층층이 포개진 역사의 자취, 과거와 현재 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 선들에 의해 가려지고 얹혀진 지난 시간의 여러 흔적과 편린들이 자욱하다. 그녀의 그림은 한결같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토우와 연꽃의 등장은 일종의 환생과 불사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기도 하고 새로운 내세의 소망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원초적인 소망, 풍요로움에 대한 간절함 을 물씬 풍겨주는 그 토우의 이미지는 시공을 초월해 공감을 주는 감동이고 이미지의 힘일 것이다. 공들여 만든 바탕면에 선들을 채우고 토분과 아클릴릭, 안료등으로 토우, 오리, 연꽃, 물고기 등을 그려넣거나 실크스크린으로 토우 사진을 찍어 올려놓는 작업은 지나간 것, 전통에 대한 노스탤지어, 회고적이고 복고적인 관심사를 은연중 짙게 풍겨준다. 화면구성과 방법론이 바로 그러한 시간과 역사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를 가설 하고 있다. 작가는 지난 시간대에 살다간 이들의 간절한 인간적 소망과 삶의 흔적에 커다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 무수한 시간과 날들의 가 시화가 선들의 궤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어진 선 하나 하나는 지난 시간의 흔적과 자취를 머금은 역사인 셈이다. 무수하게 선들을 그어 올린다는 행위 속에는 그런 시간, 역사를 다시 한번 그림그리는 행위 안으로 불러들이고 체험해보려는 시도일 수 있다. 우리는 역 사를 자신의 육체 안에서 재생함으로써 인간의 삶 전체를 경험 해보고 그를 통해 자신이 어떤 연장선상 속에서, 역사의 시간대위에서 생존하고 있는 한 인간임을 자각한다. 그림은 그런 자각을 실재적으로 구현시켜주는 행위에 다름아니다. 현재 김은숙의 작업은 자신의 그 같은 관심사를 그림그리는 일과 결부시키고 있다. 그림은 일상적 삶의 수행과 같은 일이자 자신이 존재를 끊임없이 반추시켜주는 장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그런 일과 실천적 장으로서의 그림은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현존한다. 그림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 의미는 지극히 정교하게 고려되고 뛰어나 게 조형화된 요소들에 의해 지지된다. 아마도 그런 지점이 이 작가의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