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삶은 다른 곳에 "la vraie vie est ailleurs”라는 문장은 시인 랭보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밀란 쿤테라는 이 문장을 제목으로 장편소설을 쓰기 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랭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다. “La vraie vie est absente. Nous ne sommes pas au monde 진정한
삶이란 부재하며, 우리는 세상에 있지 않다-고. 어째서 이런 와전이 일어난 것일까? 어째서 부재absente와 다른 곳ailleurs이 혼동된 것일까?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이런 혼동이 쉽사리 이해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재란 지금 여기 없음을 말함으로써 절망의 감정을 느끼게 하지만, 또한 그러한 절망이 우리를
다른 곳에 존재할 지도 모를 희망의 장소로 떠미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이 지금 여기 없는 것이라면,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 희망하게 된다. 그러한 소망은 허위로서의
삶이 그럼에도 몰락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 지금 이 순간, 오늘의 삶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는 없을 지라도 내일 또는 다른 곳에서 그것과의 조우가 가능할 지도 모를
것이라는 소망이, 마치 위태로운 촛불처럼 꺼지지 않고 지속되도록.
백가령의 사진 작품들은 이 같은 우리의 소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환멸을 경험하게 한다. 그녀의 작품은 부재를 이미지화 하고 그것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주는 상당한
하중을 관객의 시선에 강제하기 때문이다. 빈 접시와 식기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텅 빈 풍경의 익명성. 나의 존재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나의 부재를 비추는 손거울 속의
허상. 허무 그 자체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바다. 그녀의 작품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의 풍경은 모두 텅 빈 것들의 역설적 풍요로움이다. 어디에나 편재하는 부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의 무의미를, 침묵에 다름 아닌 그것을 발음하는 실어증의 이미지들. 또는, 이미지의 거식증이라 해도 좋을 핍진함이 가득한 세계가 그곳에 있다. 이토록 우울한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이 관객인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욕망할 만한 색과 형태를 남김없이 앗아가는 방식으로 촬영된 사물들의 이미지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 수 있는가? 절망일까? 작품은 자신이 도달한 환멸의 장소에서 함께 소멸할 것을 요구하는가?
백가령의 작품이 가진 힘은 우리의 이 같은 질문과 망설임을 단번에 정지시키는 매혹이다. 작품 앞에 선 관객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부재에 취할
뿐이다. 존재의 가벼움이 주는 거대한 무게의 짓눌리는 역설적인 쾌락에 심취하게 된다. 그것은 세계의 환상에 대항하는 또 다른 환상이지만, 자신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부조리한 환상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허무의 무게로 관객의 망막을 지긋이 압박하는 기이한 환상. 그것은 T. S. 엘리엇의 시에서처럼
우리를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죽음의 이미지이며, 그런 다음에는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리라”고 말하는 이미지이다.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주리라”고 말하는. 프로이트가 탐닉했던 낯익은 낯설음Uncanny의 공포가 그곳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에 취한다.
가장 진실한 거울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부재를 비추는 백가령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텅 빈 것의 무게에 눌리는 쾌락을 탐닉하도록 초대된다. “진실한 삶이란 부재한다”는 치명적 사실을
온전히 수용하도록 만드는 기이한 매혹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의 환상이 몰락하면, 그런 다음 각자의 삶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도록, 각자의 작은 환상들이 다시 창안될
수 있도록. 그녀의 작품은 그렇게 허무의 덫을 놓아 관객의 시선을 몰락으로 유혹하고 있다. 부재를 세공하는 그녀의 작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그와 같은 승화의 윤리학이다.
만일 예술이라는 환영적 세계에 기대할 수 있는 윤리적인 무엇이 존재한다면, 백가령의 작품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실어증은 정확히 그와 같은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을, 일종의
하얀 거짓말인 그것의 기능을 숨기고 있다.
백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