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칠 VANITY PAINTING _윤영혜 초대전 (갤러리 아트셀시)
  
 작성자 : artcelsi
작성일 :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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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덧없는 칠 VANITY PAINTING _윤영혜 초대전 (갤러리 아트셀시)
전시작가 : 윤영혜 YOON, YOUNG HYE
전시일 : 2019. 11. 20 - 12. 03
전시장 : GALLERY ARTCELSI
오프닝 리셉션 : 2019. 11. 23. 토 오후 4시





회화에 숨은 덫, 덧없는 칠

황윤역 (미술사학박사, 미술평론)

요즘 사람들은 넘쳐나는 뉴스와 정보를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휴대폰을 들고 산다. 그 안에는 그들이 원할 때만 연결할 수 있는 세계와 인간관계 그리고 개인의 사생활이 담겨있다. 하루 안에도 어떤 이의 삶이 실시간 검색의 수면위로 떠올라 180도 바뀐 성공가도를 걷는가 하면, 반대로 난도질 당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들이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가벼운 손놀림만으로도 한 인간의 생사와 공동체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윤영혜는 늘 이런 뉴스들을 보며 격동하는가 하면 그 다음날 나오는 번복기사를 보며 속았다는 느낌과 더불어 격분한 어제의 자신에 몸서리를 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조작되었고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해소할 수 없는 상황,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춰진 진실은 어딘가에 있음을 분명히 믿는다고 한다.

윤영혜는 이전 회화에서 대상의 극 사실적 표현이 곧 회화라는 사실조차 감추기 위한 장치였다면, 현 작업에서 캔버스에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는 행위는 어쩌면 이것이 회화라는 사실을 자명하듯 아무런 의심 없이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의 허점을 간파하고 그 틈을 공략하는 듯하다. 관람자로 하여금 작가가 제시하는 것을 그대로 믿지 말기를 당부하듯 그는 몇 가지 회화 버전을 만들어낸다.

그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업은 늘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드러내 보여주어야만 알게 할 수 있었다. ‘무언가의 실존’이라는 것 자체가 타인의 인정과 알아차림으로써만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시적,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작업을 하지 못해도 안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재현되는 작업들이 바로 그러하다. 이를 반증하듯, 그는 Sns계정에 2019년 4월 1일부터 거의 매일같이 ‘덧없는 칠’이라는 주제로 물감 마티에르 작업(작가의 실존)을 드러내기 위한 업데이트를 시작했다. (마티에르는 작가의 행위 곧 실존 그 자체를 담고 있는 상징이 아니던가.) ‘어제의 칠’을 ‘오늘의 칠’로 덮음으로써 마치 어제 행했던 작업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고 덧칠로 인해 감춰지게 되는 형식을 삼았다. 그리고 계속된 업데이트 중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 ‘…하루하루 쌓인 물감이 어느덧 꽤 쌓여서 바닥에 뉘어놔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물감이 마르는 속도와 매일 물감을 얹는 속도가 서로 맞지 않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속이 터져 물감이 비어져 나오거나 주르륵 걸쭉하게 흘러나오기도 한다. 생각지 못한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다. 몇 개월 더 작업하면 까딱하면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략)’ 그러나 윤영혜는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여 실제와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일종의 ‘조작된’ 이미지들을 줄곧 올렸다.

그의 작업실에서 마주한 실제 작업은 물감이 덕지덕지 발려있고 걸쭉하게 흘러내려와 있는 묵직한 기둥처럼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 ‘물감 탑’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그는 캔버스 위에 빈 택배박스와 스티로폼 조각들을 이용해 탑의 형태를 만들어 그 위에 ‘클레이’로 물감 모양을 만들어 덧붙였다. 그 후, 겉면에 유화물감으로 색을 입혀 마치 진짜 물감으로 쌓여져 번들거리는 탑 같은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 모든 과정을 알 리가 없는 관객들은 특별히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오롯이 물감만으로 이뤄진 작업으로 믿을지도 모르겠다. ‘물감 탑’은 ‘보이지 않는 것’ 을 눈앞에 보여주려고 하는 역설의 상징물이다. ‘있음’을 반증하기 위해 눈앞에 보이게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행위인가! 눈앞에 드러난 이 조악한 ‘물감 탑’을 보시라!

그와 반대로 ‘Massive Painting’은 그가 제작한 유화 이미지들을 합성하여 새로운 회화이미지로 구현하였다. 캔버스 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지만 남겨진 ‘이미지’들은 왜곡되고 재편집되어 거대한 ‘조작된 회화 이미지’로 변환된 것이다.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 진실과 달리 재구성되는 가짜 뉴스처럼. 인쇄되어 매끈한 마티에르 이미지는 그 덩어리를 다른 형태로 둔갑이라도 하듯 사각기둥의 형태로 전치된다. 그러나 동시에 기둥 뒤로 돌아가면 ‘ㄷ’자 형태의 3면을 마주하는데 ‘미러 필름’으로 인해 이미지가 양쪽으로 무한히 반사된다. 증식하는 조작된 가짜 회화의 확장이 마치 관객에게 가짜 정보가 범람하는 가상의 세계로 초대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반복하는 미끌어짐을 경험하게 한다. 가짜 물감 탑처럼 비워져 있으나 거울에 반사된 일루전으로 인해 역으로 다시 채워짐을 확인하게 된다. 마치 작가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작업의 재현을 목격하듯 말이다. 이렇듯 작가는 회화를 너머 무언가의 ‘존재’를 역설한다.

앞서 언급한 ‘덧칠’의 의미는 비 가시적, 비 물리적 존재를 역설하는 수단이라면 이 회화에서의 ‘덧칠’은 그 존재를 재현과 동시에 재현에 관한 질문이 되겠다. 물감으로 이뤄진 페인팅을 다시 물감으로 재현하는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회화가 어느 시점에서 촉발되고 재현으로 마무리 되는가에 관한 문제와도 직결된다. 작가는 메시지를 역설하기 위해 ‘회화’를 ‘메타포’로 이용하였고, ‘회화적’ 사고(마술적 리얼리즘과 맞닿는)로서 고찰한 메시지는 다시 ‘회화-화’되어 나타난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인 바니타스 회화를 보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8)) 성경에 기록된 글을 주제로 삼은 회화들은 역설적으로 모두 사라져버릴 덧없는 것들임을 경고할 목적이 무색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삶에서 탐욕하는 모든 것들을 눈으로 사로잡을 수 있으리만큼 그렸다는 것은 그 자체에 이미 사로잡힌 삶임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실로 작가들은 자신의 붓 놀림만으로도 마법처럼 눈앞에서 현현하게 되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 그것은 실존하는 것들을 가질 수는 없어도 마치 이미 가진 것 같은 ‘헛배부름’을 체험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윤영혜의 작품을 살펴보면 회화로 불거진 문제들을 다시 회화로써 풀어내려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변증적 회화의 성격을 가진다. 그는 사유의 결과물을 단지 회화의 형태를 빌어 표현했지만 회화 자체가 종착지가 되기 보다는 사유의 층위를 재현하는 프로세스에 가깝다. 작가의 개념을 전하는 일종의 언어인 셈이다. 보이는 것을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것은 르네 마그리트의 (Ceci n’est pas une pipe) 와도 맞닿아있다. 회화가 회화로써, 또는 비-회화로써 재현된 작업들은 모두 작가의 의도에 맞춰 각자의 역할을 하는 언어들이다. 윤영혜는 다층적으로 채집된 언어들을 캔버스 위에 교묘히 합성하고, 캔버스를 넘어 공간 속에 그리고 관람자의 사고체계로 침투한다. 나아가 작가는 그의 언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시평론’을 이용한다. 윤영혜는 ‘황윤역’이라는 가상의 평론가의 존재를 만들어 이 전시의 평론을 맡겼고, 회화를 비평하는 회화를 너머 전시를 비평하는 평론을 환영으로 재현하기에 이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작과 끝인지 알 수 없는 이 역설의 게임에 참여하게 된 관객은 실로 쓴웃음을 부르는 덫에 걸린 셈이다. 맨 처음 피드를 올린 날짜를 보면 4월1일인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작가가 숨긴 의도가 생각보다 적은 팔로워 수 때문인지 크게 이슈가 되지 않은 것은 안타깝게도 보통의 미술작가들의 현주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영혜는 조용하게, 거침없이,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는 작가이다. 그 안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가 찾는 것은 분명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든다. 관객들은 그가 만들어낸 일루전들을 그저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해체하여 덧그릴 준비가 되었는지 묻고 싶다. 이 ‘회화 같지 않은 회화’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