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위장하기, 드러내면서 더 깊숙하게 숨기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하이드홀릭(Hideholic). 최유희가 자신의 그림에 부친 주제다. 무슨 정신 병리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전문용어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작가가 만든 조어로서 은폐충동을, 그리고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숨기 혹은 숨기기 놀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숨고, 무엇을 어떻게 숨기는가. 의식으로부터 달아나 무의식으로 숨고, 상처를 무의식에 숨긴다. 이렇게 주제를 풀어놓고 보면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진다. 이 주제는 작가의 유별난 경험을 대변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개별적 경험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고, 또 그 상처를 속으로 삼킨다(무의식 속에 숨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상처를 남에게 들키고 싶지가 않다. 여기서 위장이 나온다. 자신을 화려하고 예쁘게 꾸며 상처 따윈 자기와는 상관없는 양 하는 것이다. 상처가 크면 더 화려하게 꾸민다. 외양이 화려한 만큼 상처도 더 크고 깊다.

상처와 위장, 그 이면에 상처를 숨겨놓고 있는 외장, 그 이중성과 양면성이 바로 작가의 작업을 관류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의 인식은 얼핏 알만한 형상 같기도 한데 사실은 보면 볼수록 오히려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드는 형상들, 그 자체 결정적이라기보다는 지금 한창 변태 중인 현재진행형의 형상들, 친근하면서 동시에 낯선 형상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형상들, 무한 증식되는 형상들, 자가 증식하는 형상들로서 나타난다. 화려한 상처와 위장된 무의식(차라리 무장된 무의식으로 봐야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그 중 한 경우가 평면 위에 이미지를 포치한 것이다. 화면의 상당 부분을 파스텔 톤의 단색으로 칠해진 평면의 여백으로 처리하고, 그 화면의 한쪽에다가 이미지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 이미지를 보면 나무들이 모여 작은 숲을 이루게 했다. 나무들은 실물 그대로를 재현했다기보다는 다소간 양식화된 것들이며, 나아가 아예 추상적인 문양이나 패턴(이를테면 주로 식물을 양식화한 문양들과 땡땡이 문양이나 별 문양 등등)이 나무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모티브들은 주로 꽃이나 버섯, 그리고 올망졸망 모여 있는 선인장 같은 식물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들이 많지만, 왠지 동물성을 느끼게 만든다.

동물성이 감지되는 식물성? 생물학적 혼성? 연이어진 관절을 지니고 있어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절지동물이나 절지곤충의 돌기 같은 형상들이 있고, 수생식물이나 수생동물들의 형상도 보인다. 허물거리는 연체동물이나, 여러 개의 발을 가진 다족류, 그리고 보기에 따라선 신체의 장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는 무슨 무지개 빛깔의 막대사탕 같기도 하고, 애기들의 딸랑이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형상도 있다. 알만한 형상들과 추상적인 문양이 그 경계를 허물고 상호 삼투되고 있는 그림들이 얼핏 잘 다듬어진 인공정원 같은데, 사실은 보면 볼수록 왠지 미심쩍고 의심스럽다. 어떤 알 수 없는 움직임마저 감지되는, 몸통(형상) 바깥으로 삐죽삐죽 돌출해 있는 돌기 형상이 혹여 위험할지도 모를 외부 상황을 탐지하는 곤충의 촉수 같기도 하고, 덧나고 부풀어 오른 내면의 상처(육화된 상처?)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온갖 이질적인 형상들을 외부로부터 지지하는 장치(보조 장치?)가 보인다. 그 전형적인 경우가 상자다. 상자는 모티브를 하나로 모아 놓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더러는 전개도처럼 펼쳐져 그 속의 내용물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상자는 일종의 작가 자신의 내면풍경이나 무의식의 방을 은유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속에 담겨진 내용물들은 무의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상자로 나타난 무의식의 방은 다른 그림에서 일종의 섬으로, 무대로, 나아가 무슨 지지대를 가장한 케이크로도 변주된다.

이처럼 여백이 있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의 여백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미지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들도 있다. 공간공포(빌헬름 보링거가 추상충동과 결부시킨)를 느끼게 하는가 하면, 바로크적 확장이 감지된다. 화면 자체가 완결되어져있다기보다는 생성 중에 있는 것 같고, 자기 외부로 무한정 증식되는 어떤 거대한 비전의 일부를 보는 것 같다. 화면의 아무런 부분을 임의적으로 잘라내도 무방할 것 같고, 화면 속에서의 모티브와 모티브 간에 어떠한 서열도 찾아볼 수가 없는 균등화 내지는 균질화가 실현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균질화된 화면은 말할 것도 없이 숨기 혹은 숨기기라는, 그리고 위장과 은폐라는 주제의식과 통한다. 군대의 얼룩무늬 위장복에서 볼 수 있는, 그리고 위장의 명수로 알려진 카멜레온이나 자벌레(여름에 초록색이었다가 가을에는 갈색으로 변하는)에게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자기보호본능에 견줄 만한 상황(위장)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더러 원색의 화면과 모노톤의 화면을 대비시킨 이중화면도 있다. 이중화면은 면과 색채에 의해 서로 단절되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구성상으론 하나로 연이어진다. 이중성과 양면성으로 나타난 마음의 지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무대를 연상시키는 포맷이 특징인 그림들이 있다. 자기내면의 방을 살짝 열어서 보여주는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그 마음 속 무대 위에 자신의 무의식이 그려낸 온갖 이질적인 모티브들을 출연시킨다. 이 무대에서만큼은 객석도, 무대도, 커튼과 같은 무대를 장식하는 보조 장치도, 그리고 심지어는 무대 위에 드리워진 빛 곧 조명마저도 하나같이 추상적인 패턴으로 전이돼 하나로 어우러진다. 과도한 판타지와 일루전이 시지각적 페닉 상태로 몰아가는 나르시스의 극장 그리고 작가는 드물게 변형캔버스를 사용하기도 한다. 대개는 원형으로 나타난 그 그림들은 일종의 우주에 대한 메타포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특히 무슨 파충류나 물고기의 비늘 같은 하나의 문양이 반복적으로 중첩된, 그 집요한 반복이 거의 편집광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우주의 만다라(우주의 원리를 추상적인 그림으로 도해한), 마음의 만다라, 존재의 만다라를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머리가 크고 긴 꼬리를 가진 용 같은 형상도 있고, 설핏 사람 얼굴의 실루엣 형상도 보인다. 숲을 배경으로 폭포가 있고 절개지가 있고 단층이 있는, 그 한쪽에 연못과 분수가 조성된 인공풍경도 있다. 대지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 있는가 하면, 종류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오랜 동굴(무의식의 메타포) 속 같은 스펙터클한 풍경도 있다. 이런 풍경과 함께, 기하학적 패턴으로 조성된, 중심성이 강한, 좌우대칭이 뚜렷한, 마치 이슬람 사원의 돔을 아래에서 올려다 본 것 같은 그림이 있는가 하면, 무슨 현란한 놀이기구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그림도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그림들에서, 이 모든 형상들에서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무엇 무엇처럼 보일 뿐, 그렇게 암시될 뿐. 밤은 낮에 본 것을 감추고, 무의식은 의식이 본 것을 왜곡시킨다. 무의식은 억압된 의식이며, 그 억압이 왜곡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곡된 형상은 설핏 실물을 닮았지만, 사실은 현실 속에서 그 어떤 등가물도 찾아볼 수가 없는, 그 자체 자족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독자적인 존재성을 견지하고 있다. 이로써 작가는 세상에서의 사물이 놓여진 질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질서로 축조된 어떤 다른 세계로, 자기만의 방으로, 무의식의 방으로, 숨어있기 좋은 방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