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개인전을 준비하며



최석우

문득 문득 생각에 잠길 때면 깊은 심연에서 떠오르는 형언하기 힘든 외로움과 쓸쓸함이 정신을 아득하게 할 때가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불안, 광활한 우주에서의 미미한 인간 그리고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 지금 여기서 그림 그리고 있는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막막한 공포와 허무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작업실에 안자 화면을 대할 때 마다 느끼는 막연한 기대와 긴장은 도전의식과 성취욕을 발동시킨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올은 길인가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르면 막연하게 불안감이 엄습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안한 존재인가 보다. 생존에 대한 불안은 생계에 대한 불안을 만들고 그 불안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기댐이나 의존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문명을 만들고 문명의 틀 안에서 발전해 지금의 현대를 만들었다. 우리 인류는 근대 서양이 발견하고 발전시켜온 과학과 기술이 결합한 문명이 현대를 이끌고 만들어 왔다. 지금 우리는 그 해택 속에서 과거 근대 이전에 살았던 인류와는 비교 할 수 없는 풍요와 장수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 지 않은 빈부 격차 오염의 문제 에너지문제 기후변화 자본주의의 패해 등 산적한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

근대가 만들어낸 미학적 도전은 인간 중심적 시각을 통해 발전 하였고, 현대 과학적 시각 경험이 현대 미술이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많은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 이후 모던이즘 그리고 현대미술에 이르기 까지 서양의 역사는 빈곤과 질명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하고 다른 문명들을 추월하면서 압도적인 문명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반면 커다란 전생을 일으켜 그 전쟁 양상이 대량학살 하는 무기를 만들어서 인류를 위험에 처하게 하였고, 산업 발전으로 인한 부산물로 각종 오염을 일으켜 지구 환경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구 위의 인류에게 성취임과 동시에 커다란 숙제이기도 하다.

근대가 발명한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태도는 자연을 이성적으로 판다하고 재단하여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개발하고 조작 되었다. 이는 인류가 번성하여 지구위의 우점종이 되었다는 것 이다. 근대의 미학은 인류가 발전하므로 보다 안전하고 보다 편안한 이상사회를 꿈꾸었으나 이는 근대를 발명한 그들의 것 이었고 그들 밖의 사람들은 착취와 정복의 대상 이었으므로, 모던이즘은 편파적 이고 파괴적인 시각 이라할 것이다. 인상주의가 발견한 자연의 다채로운 빛의 눈부신 색의 미학은 현대의 미술 발전의 모태가 되었다. 다양한 가등성이 실험되었고, 양차대전으로 인한 상처는 모던이즘으로 표상되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미학적 태도를 회의 하게 되었다.

왜? 인간은 이런 일들을 일으키고 감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나? 관찰하고 생각해 보면 인간은 점점 더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 해 오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위대한 성취 뒤의 어두운 그림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다행이도 우리는 문제를 인식하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제시되기도 하고, 많은 분야에서 해결 방법이 속속 제시 되기고 하고 있다. 이는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희망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작업실 앞을 걷다 발견하는 보도 불럭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솟아나는 풀잎에서 나는 위대한 생명의 기적을 발견한다. 그 사소하게 여겨지는 생명의 모습이 우주가 만들어낸 궁극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모습에서 미학적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서부터 인간의 문화와 윤리, 사회 시스템을 발전 시켜 왔다. 전통적 의미에서 동양이 발전 시켜온 공동체의 모습은 질서를 추구하고, 자연의 파괴 보다는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 왔었다. 그러나 서양 근대 문명과의 경쟁에서 밀림으로 해서 동양의 그것은 미개한 방식으로 취급 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서양이 발견한 미학적 기반 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인류가 처한 변화에 대한 압력과 위험 신호들은 뭔가 다른 삶의 방법을 찾으라고 종용하고 있다. 나는 모던이즘이 만든 사회의 모습은 한계 지점에 와 있다고 느낀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것 이다. 농경민의 우주관과 기마민의 우주관이 갈등하고 융합하면서 발전한 동아시아의 세계관은 우주의 순환 원리를 기반으로 한 자연관과 인간관 미학을 발전 시켜왔다. 비록 서양의 그것에 밀려 한동안 소외되고 무시되어 왔지만, 나는 여기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양의 우주관은 자연을 파괴하고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인간이 그 안으로 들어가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였다. 자연을 착취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인간을 보호하고 성장 시키는 모태로 여기면서 신성시 하였다. 이는 자연을 경외하는 인간의 본성이며 미학 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무에서 생명의 지극한 모습을 발견한다. 생명 시스템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고 생태계가 이루어지고 생명을 기를 수 있는 자양분을 만들어 냄으로 생명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명현상을 미학적 원리로 받아 드리고 작품에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연의 그 지극함과 창조성은 생명의 궁극의 모습이다. 내 작품은 바탕 작업을 많이 해서 바탕이 가지는 바탕의 표현 영역을 작품에 끌어 드림으로 형상으로 표현되는 물질과 바탕이 가지는 질감의 물성을 이용해서 표현 영역을 확대 하고 있다. 거친 화면이 만들어 내는 물성과 질감이 형상과 조화를 이뤄 좀더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하려 노력하였다. 이제는 좀 더 섬세한 표현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