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우의 회화 - 그 숲에 가고 싶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비(碑)-



고충환(미술평론)


봄에 산은 연녹색으로 파릇하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새순들의 어린잎들이 엽록소를 머금기 시작해 마치 그 속에 빛이라도 품고 있는 양 그 색깔이 여릿하고 투명하고 맑다. 여름에 산은 짙푸르다. 그새 엽록소를 충분히 저장한 잎들은 두툼하게 살이 오르고 그 표면에 불투명한 막을 형성해 더 이상 빛을 투과하지도 투명하지도 않다. 빛을 머금기보다는 내치는 만큼 그림자도 크고 대비도 뚜렷해진다. 가을에 산은 갈색으로 변한다. 그동안 축적한 엽록소를 본격적으로 소비하는 시기이며 나무들이 엽록소를 다 소진한 잎들을 떨쳐내고 홀로 설 준비를 한다. 겨울에 산은 은회색으로 뒤덮인다. 마침내 잎들을 다 떨쳐버린 헐벗은 나무들이 눈비라도 올 때면 숫제 검은 색 천지로 변한다. 산은 그 속에 사계를 품고 있고 온갖 색깔들의 스펙트럼을 품고 있다. 빛과 대기와 잎들이 서로 희롱하는 과정에서 나와진, 그 중에는 색상 표에도 없고 이름마저 없는 색깔도 허다한, 외부환경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무시로 변하는, 이 색깔들의 향연 앞에 서거나 그 속에 있으면 문득 자연이 살아있다는 속설이 실감이 난다.

속설? 자연이 살아있다는 속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에게 자연이 살아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나 현실이 아닌 속설로, 풍문으로 남아있다. 자연을 실감하기 위해선 상상력을 공 굴려야 하고, 자연도감을 뒤적여 찾아낸 인상의 편린들을 재구성해야 하고, 시나 소설 속 행간을 뒤져 자연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내 그 글을 이미지로 바꿔야 한다. 그렇게 할 능력이 없거나, 그렇게 하기 위해 공들일 시간이 없거나,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마저도 불가능해진다. 무미건조한 개념으로 한정된 자연, 도감과 사전 속 정의로 박제된 자연, 죽은 자연에 감사하고 만족할 밖에. 조화가 생화보다 생생한, 파르스름한 물속과도 같은, 기계자궁이나 전자심연과도 같은 모니터를 통해 본 자연의 이미지가 자연 자체보다 더 실감나는 이 인공의 시대에 자연은 도대체, 그리고 새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연은 과연 건조한 개념이나 죽은 박제로 남겨질 만큼 인간에게 내어줄 수 있는 모두를 다 소진해버린 것일까.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자연은 상실된 것이기에 그만큼 더 절실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연에 대한 상실감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사건이다. 인식의 경계를 한 발짝만 벗어나면 그대로 무지의 영역이다. 그 무지의 영토 속에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었고 있다.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말로 옮길 수 없는, 미신으로 치부되곤 했던 범신론, 물활론,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의 베일에 가려진 채, 인간의 인식과는 무관하고 무심하고 무정하게 자연은 그대로 있다. 인식 바깥에서 처음 보듯 낯설게, 이질적으로, 생경하게 자연과 대면하는 것, 그리고 그 첫 경험을 더듬는 말로써 겨우 옮기는 일, 그 신비주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일이 아니고서 그 상실감은 치유되지가 않는다. 어쩌면 자연은 상실감 자체(상실감의 원형?)일지도 모르고, 지금 새삼 자연을 직면하는 일은 그 상실감을 복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최석우는 나무를 그린다. 처음에는 꽃을 그리다가 점차 나무로 옮겨왔다. 꽃이든 나무든, 그것을 그리는 이유는 그 속에 생명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꽃이나 나무는 생명의 메타포이며 구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꽃이나 나무로 하여금 어떻게 생명을 암시하고 느끼게 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꽃이나 나무를 닮게 그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닮은꼴 속에 생명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다만 죽은 그림이며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으로 하여금 그림에 그치지 않고 생명의 메타포가 되게 하는 것(마치, 나는 그림이 곧 살이라고 생각한다, 는 루시앙 프로이드의 전언에서처럼)이 가능해지려면 꽃과 나무가 생명을 어떻게 머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꽃과 나무는 (정해진) 형태가 있지만 생명은 (정해진) 형태가 없다. 자연으로 치자면 나투라와 피직스에 비유할 수 있겠다. 감각적 자연(혹은 자연의 감각적 국면)을 피직스라고 한다면 감각적 자연의 원인(작가의 화법으로 옮기자면 생명)이 나투라다. 우리 용법으로 말하자면 음과 양에 해당한다. 자연의 태가 양이라고 한다면 자연의 원인이 음이다. 그리고 음과 양은 한 몸이다. 이처럼 음과 양이 유기적인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한 몸이 자연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여전히 생명을 머금고 있는 자연을 그릴 수 있기 위해선 자연을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답게 그려야 한다(자연을 닮은 그림과 자연다운 그림은 다르다). 자연을 닮은 그림은 과정이며 수단(방법)에 지나지 않지만, 자연다움(자연의 본성 혹은 생명)을 상기시켜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정해진) 색깔도 형태도 없는 자연 자체, 자연다움, 자연의 본성, 생명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 것인가. 하이데거는 사물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그 사물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는 순간(사물이 내재하고 있었던 생명을 내어주는 순간)이 온다고 하면서, 그 순간을 세계의 개시라고 했다. 나의 집요한 쳐다봄에 의해 비로소 열리는 세계, 내가 집요하게 쳐다보는 행위와 과정이 없었더라면 결코 존재의 표면 위로 나와지지 않았을 세계, 내가 집요하게 쳐다보는 행위가 낳은 세계다. 세잔이 생트- 빅투아르 산이란 광맥으로부터 캐낼 수 있었던 세계 역시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최석우는 어떻게 자연 자체, 자연다움, 자연의 본성, 생명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가(루시앙 프로이드 식으론 캔버스로 하여금 어떻게 몸이 되고 살이 되게 하는가). 자연을 닮은 그림은 비록 과정과 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자연다움 곧 생명을 상기시켜줄 수는 있다고 했다.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자연을 닮게 그리는 과정을 유지하면서, 이를 통해서 자연다움의 본성 곧 생명을 상기하고 암시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이를 위해 몇 가지 방법이 모색되고 있는데, 처음엔 다소간 상징적이고(차라리 도상적인) 개념적인 방법이 눈에 띤다. 이를테면 자연의 본성을 순환하는 생명으로 전제하고, 이를 반영하고 있는 계기가 사계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 위에 각각 사계를 상징하는 색면들(계절을 색깔로 환치시켜놓은 색면들 혹은 오방색)을 중첩시켰다. 그리고 일종의 이중화면을 시도하는데, 이중화면은 유사성(이를테면 전체와 부분을 대비시킬 때)에 착안해 매치되기도 하고, 차이(이를테면 만개한 꽃과 시든 꽃을 대비시킬 때) 때문에 하나로 놓이거나 한다. 자연의 순환성을 순환하는 사계의 상징색으로 환치시키고, 생과 멸을 대비시키는 것으로 변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목되는 부분으로 클로즈업 기법과 함께 일종의 사물초상화의 개념이 엿보인다. 클로즈업 기법 자체가 어느 정도 사물초상화 개념에 연동되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꽃 그림에서 이 기법은 대개 꽃이 주변배경으로부터 단절된 탓에(물론 일부 배경화면이 같이 그려진 경우도 있지만) 무슨 스냅사진처럼 순간을 박제화한 듯한 느낌이 들고, 꽃을 사물화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 기법이 어쩌면 더 감각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경우로는 전작에서의 꽃 그림보다는 근작에서의 나무 그림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클로즈업 기법은 거리의 문제며 줌의 문제다. 거리가 달라지면서 사물에 대한 인상도, 감도, 그리고 개념마저도 달라지는 것과 관련된다.

나무를 소재로 한 근작에서 이 거리감은 감각적이고 절묘하다는 생각이다. 배경화면을 적절하게 할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피사체인 나무의 위아래를 잘라내 화면을 가득 채우도록 설정된 프레임이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주고, 바로 그 나무 앞에 서 있는 느낌을 준다. 육박해오는 숲이며, 나무의 육질이 코앞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역광으로 인해 실제보다 더 어둑하게 표현된 나무 뒤쪽으로 보이는, 한창 햇빛과 희롱하고 있는 하늘거리는 나뭇잎들의 유희가 대비되면서 화면 뒤쪽으로 공간이 열리고, 그 공간을 길 삼아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어떤 그림에선 햇살 가득한 숲이 감지되고, 다른 그림에선 숲이 머금고 있는 습윤한 기운(대기)이 와 닿는다.

햇살 가득한 숲, 습윤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숲, 육질이 전해져오는 나무, 햇빛과 희롱하고 유희하는 나뭇잎, 이 모두가 어우러져서 열어놓는 어떤 지경(가시적인 계기들이 암시하는 비가시적인 경계)이야말로 바로 작가가 그토록 자연의 표면 위로 끄집어 올리고 싶어 했던 생명이며 생명현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명을 고정된 형태로 붙잡을 수는 없다. 어떤 움직임이 감지되는 그림, 미미하지만 항상적인 변화를 암시하는 그림 속에 겨우 깃들 수 있을 뿐이다. 적어도 작가의 그림에서 감지해낸 이런 느낌의 지점과 성분들이 한갓 말들의 향연이나 수사학적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이 소재해 있는 소토메 마을 한 귀퉁이의 작은 돌에 새겨진 이 글귀는 인간의 형편과는 무관한, 무감하고 무상한 바다의 성정을 증언하고 있다. 바다는 인간의 슬픔을 삼켜 그 슬픔의 크기보다 더 푸르르고, 심연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만큼 더 푸르르고, 인간의 개념으로 거머쥘 수 없는 만큼, 항상 그 만큼 더 푸르르다.